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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7회) • 충남 예산의 독립만세시위 113 그러나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고 구금 자 구출을 위해 다시 주재소로 진입했다. 이때 헌병과 보병들 이 실탄을 발포하여 2명이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만세 군중 들은 해산했다. 시장 상인들이 일제히 상 점을 닫고 일제의 무 단 발포에 항의했다. 언제든지 다시 만세시위가 일어 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고덕헌병주재소는 홍성수비 대의 응원을 요청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장문환은 재 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매일신보』는 아날 만 세시위 군중이 2천~3천명의 대군중이었음을 보도했 다. (『매일신보』, 1919. 4. 11) 광시면 광시면은 예산군 남부 끝에 있다. 4월 4일 광시면 하장대리에서 25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 다. 그날 밤 산상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다 음날인 4월 5일 새벽 3시 광시리에서 약 4,000명의 군중들이 집합해 면사무소를 공격했다. 이에 광시헌 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해 공포탄을 발포하며 만세 시위 군중을 해산했다. 또한 하장대리에서는 4월 4 일에 이어 이날도 40명의 군중이 2회에 걸쳐 독립만 세를 불렀다.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도 인사 9명을 체 포했다. 삽교면 4월 4일 예산 군내 야간 횃불시위가 펼쳐진 후 이 튿날인 4월 5일 삽교면 목리에서 박성식(朴性植, 37 세 농업)은 약 40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 뒷산 에 올라가 불을 피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4월 6일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에서 김헌식에게 독립 만세를 권유했다. 박성식은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6 월의 옥고를 겪었다. 예산의 각 면은 헌병대의 압박 속에서도 결국은 2 천 명에서 4천 명의 대규모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펼 쳐 이 지역의 저력을 보여 주었다. 충남 최초 3·1운동 발생 기념 동 상(예산군 예산면) 4월 3일 1천여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고덕면 한내 일대의 현재 모습(독립기념관 제공)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