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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⑪ 113 인 오후 7시 55분 경, 주먹 크기 의 돌이 총독이 앉아있던 귀빈차 에 날아들어 유리창이 파손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관할 양주경찰서는 대경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5년 11 월 을사늑약 체결에 분노한 원태 우 지사가 경기도 시흥(현 안양)에 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탄 열차에 던진 돌로 유리창이 박살 나고 그 파편이 튀어 이토 히로부 미의 안면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 혔던 사건도 떠올렸을 것이다. ‘범 인’ 색출에 혈안이 된 양주경찰서 는 결국 월계리(58번지) 청년 이건 명(당시 21세)을 체포하였다. 그러 나 혹독한 고문까지 동원했음에도 배후를 찾지 못하자 ‘일시 발작의 악희(惡戲 )’, 즉 ‘못된 장난’으로 결 론 내리고 과료 19원에 처하는 것 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전설적 독립운동가 이재유 체포지와 활동터 1930년대 전설적인 사회주 의계 독립운동가 이재유(1903~ 1944)가 1936년 12월 25일에 경 찰에 의해 마지막으로 체포된 곳 은 창동역 남방 800m 지점에 있 던 철도건널목(현 녹천역 2번출 구) 부근이었다. 창동역 인근 산중 에서 경성재건그룹의 학생책임자 최호극(1915~?)을 비밀리에 만나 기 위해 나갔다가 일경에 발각된 사실을 인지하고 도주하던 중이 었다. ‘경성트로이카’에서 활동 중 서 대문경찰서에 체포된 이재유는 한 차례 실패에도 불구하고 1934 년 4월 14일 마침내 탈출하는 데 성공하는 등 신출귀몰한 인물로 통했다. 1935년에 터진 용산적색 노조 사건에서도 체포를 피한 이 재유가 이관술(1902~1950)과 함 께 수해를 입은 형제 농민으로 위 장하여 거점을 마련한 곳이 바로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노원 구 공릉동)였다. 6년형을 선고받은 이재유는 형 기를 마친 이후에도 전향하지 않 았다는 이유로 사상범예방구금령 에 따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계 속 옥살이를 해야 했고, 애통하게 도 광복을 불과 1년 남겨둔 1944 년에 옥사하고 말았다. 88서울올림픽과 영화 ‘상계동올림픽’ 88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30일이었다. 이 후 전두환 군사정권은 도시미관 정비를 이유로 올림픽 이전에 대 일제 당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31 보)」 보고. 500명이 참여한 3월 29일의  창동리 만세 시위 소식을 전하고 있다(국 사편찬위원회 제공).   이 건 명 의   사 이 토   조 선 총 독 이   탄   열 차 투석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193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