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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로는 더 이상 줌이 되지않아서 스마트폰으로 최대한 당겨서 촬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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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
독립유공자 학교
강일구, 최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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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구는 1931년 10월 충남 부여군(扶餘郡) 구룡면(九龍面)에서 이호철(李戶喆) 등과 함께 비밀연구모임을 조직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강일구는 부여공립보통학교(扶餘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만주와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31년 8월 귀향하였다. 이후 최재봉(崔在鳳)이 경영하는 조선일보(朝鮮日報) 부여지국에서 일하면서 동리의 야학교 교사를 겸임하였다. 이 무렵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깊게 인식하고 항일투쟁의 수단으로 사회과학 서적을 구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하였다. 강일구는 1931년 10월 5일 구룡면 금사리(錦寺里) 산중에서 동지들과 함께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를 결성하고 교양부를 담당하였다. 이후 1933년 3월 23일 보다 적극적인 운동실천을 위해 동회를 해체하고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여 연극, 강연 등을 개최해서 농민의 계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동년 4월 중순경에는 칠모회(七모會)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야학운영과 사회주의 사상 보급에도 힘썼다. 동년 5월 부여군 장암면(場岩面)의 야학담당자로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강일구는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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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을규는 충남 청양(靑陽) 사람이다. 1942년 일제는 소위 내선일체(內善一體)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고 있어 이기춘(李起春)외 2명과 함께 조국독립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하고 중국 동삼성(東三省) 지역 독립운동단체와 연결하려고 동삼성으로 망명할 것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1943년 봄 부여(扶餘) 청년훈련소에 강제 입소되어 있을 때, 학도병들이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4월 24일 관폐대사(官弊大社) 부여신궁(扶餘神宮)의 설립 예정지이며 신궁(神宮) 건축으로 왕래가 빈번한 낙화암(洛花巖)에서 3회에 걸쳐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1944년 4월 26일 낙화암 위에 있는 백화정(百花亭)의 동쪽 기둥을 깍아 혈서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써놓고 주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1944년 5월 2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44년 8월 6일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