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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판문점 113 을에 널판지로 만든 대문(널문)이 많았기 때문에 ‘널문리’라는 이름 이 붙여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널판지 다리를 판 문교(板門橋)라고 불렀는데 『개성 군면지』에 의하면 판문교는 개성 쪽에서 널문리를 지난 지점에 위 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6 · 25전쟁 직전 널문리는 경기도 서북쪽의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仙跡里)와 개풍군(開豊郡) 봉동면(鳳東面) 침 송리(針松里)의 경계지역에 위치 한 농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이곳에서 진행되면서부터 갑자기 국제적인 이목을 끌게 되었다. 6 · 25전쟁 휴 전협상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시 작된 것은 아니었다. 당초 휴전회 담 예비회담은 1951년 7월 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내봉장(來鳳 莊)이란 요리점에서 개최되었다. 북한측이 1951년 10월 7일 새로 운 회담장소로 널문리 주막마을 을 제의하자 국제연합측이 그 다 음날 이에 동의함으로써 회담장 소가 개성에서 널문리 마을로 옮 겨지게 되었다. 이처럼 널문리 판문점을 유명 하게 만든 휴전회담을 통해 한국 전 교전 쌍방은 우여곡절 끝에 휴 전회담 본회의 159회를 비롯하여 총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의를 거쳐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오 전 10시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 민군 총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 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조선)군사정전 협정’이란 이 름을 가진 휴전협정을 조인하게 되었다. 장기화된 휴전회담과 우여곡절 많았던 휴전(정전)협정 조인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끝나게 되자 휴전협정조인을 위하여 약 200평의 목조건물(북한은 ‘평화 의 전당’이라고 함)을 마을 부근에 세웠는데, 이곳이 두번째의 판문 점 회담장소이며, 협정조인 이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 세번째 의 장소이다. 최초의 장소인 널문 마을과 두번째 장소인 ‘평화의 전 당’은 지금의 판문점 회담장에서 북쪽으로 약 800m 북한측 비무 장지대에 있다. 지금의 회담장소도 처음에는 천막으로 시작되었으나, 휴전이 점차 장기화됨에 따라 군사정전 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감독위 원회 회의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 들이 항구적인 건물로 바뀌게 되 ➌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기의 판문점 정전회담장 전경(가운데 회담장, 오른쪽 북측 사무실, 왼쪽 유엔군 측 사무실과 기자실)(1952. 9. 18) ➍ 6 · 25직후의 판문점(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➌ 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