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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던 안중근은 러시아 경찰에 조사를 받다가 갑자기 하 얼빈 일본영사관으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러시아 경찰이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관할권을 포기한 것이다. 안중근은 며칠 동안 하얼빈 일본 영사관 지하실에서 가혹 한 고문을 당하며 취조 를 받았다. 안중근이 일 본 경찰의 고문과 협박 에도 굴복하지 않자, 일 본경찰의 삼엄한 감시 아래 여순(旅順)으로 이 송하여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안중근의 재판은 검사, 판사, 변호사, 통역관이 전부 일본인이었고, 심지어 방청인들조차도 일본인들뿐이었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는 가운데 일본인들끼리 진행 한 재판이었기에 그 결과는 불 보듯 자명한 것이었다. 안중근은 여순 일본관동법원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일본법정은 안중근의 요구를 묵살하고, 1910 년 2월 14일 재판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일제의 각본대로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7 대일 항쟁의 두 거봉, 양세봉과 지청천 1930년대 초 만주지역 한인사회의 민족주의 항일세력은 동·북만주 일대에서 한족총연합회가 한 국독립당을 창당한 후에 당군으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남만주의 동변도 안중근 의사와 안 의사가 수감되었던 여순감옥 여순 감옥내 안중근 의사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