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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2024년 9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며, 해방 이후에는 국군에 참여 하여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인물 이다. 1936년 중국 난징(南京)으 로 망명한 유해준은 조선민족혁 명당을 거쳐 한국독립당에 입당 하는 등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1940)을 거 쳐 한국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되 었다. 1943년부터는 제3지대 간 부로 초모공작을 벌였는데, 일본 군 점령지역에 침투하여 활동하 던 중 일제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유해준은 1986년 4월 15일 신사동(1-77)에서 서거하였다. 한국광복군 출신의 이종렬 (1924~2019) 역시 신사동에서 서 거한 인물이다. 이종렬은 경북 예 천 출신으로 1945년 1월 일본군 을 탈출하여 중국 유격부대에서 활동하다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전방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내공작위원회 설치 활동한 조선혁명당의 류광호 류광호(1911~?, 조선혁명군 국내공작위원회 책임자)는 만주 (중국 동북지방)에 근거한 조선혁 명당에 입당하여 조선혁명군 중 앙집행위원회 정치부장 고이허 (1902~1937)의 지시를 받고 국 내에 파견되었다. 우용하·한승수· 문순룡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36년 서대문경찰서에 체포 되어 징역 5년에 처해진 인물이 다. 평양 출신의 류광호는 1935 년 만주로 건너가 조선혁명군에 참여하기 전 신사리 큰어머니 댁 에서도 1933년 5월까지 약 6개월 정도 살았다. 류광호의 조선혁명당 국내공작 위원회 사건은 조선혁명당이 민 족주의계 정당이었음에도 국내 공작위원회를 설치한 점이 주목 된다. “노동자층과 농민층, 그밖 에 은행, 회사, 상점, 카페, 요정 등 모든 곳에 침입하여 동지를 획득한 다음 일제의 국제위기에 편승하여 조선혁명군은 국외에 서 침입하고, 내외가 호응하여 각 산업부문에서 폭동을 일으키 며, 동지를 총동원하여 일제히 혁명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목표 로 활동한 사실이 특이하다. 종래 의 국내공작위원회 설치는 공산 당을 재건하려는 사회주의계 독 립운동가들의 전매특허로 인식되 고 있었다. 신사리 수인묘지(囚人墓地) 터 숭실중고등학교 맞은편에는 서 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거나 옥 사한 사람들을 묻는 수인(죄수)묘 지가 있었다. 이곳에는 조선총독 으로 부임해오는 사이토 마코토 [齋藤實]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이 유로 체포되어 사형당한 강우규 의사, 북간도에서 군자금 마련을 위한 ‘15만원 사건’의 주인공 윤 준희·임국정·한상호 등도 묻혀 있 었다. 이곳이 재개발되면서 강우규 의사의 유해는 우이동으로 이장 유해준의 별세 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기사 (1986.4.16)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당 소속 류광 호의 체포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936.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