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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4회) • 평북 철산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1) 111 서울의 정석해 1919년 3월 1일 철산군 여한면 문 봉리 출신의 20살 정석해(鄭錫海, 1899.4.24~1996.8.14)는 서울의 연희 전문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그날 그는 친구 이정화와 독립선언의 장소인 파고 다 공원으로 갔다. 그는 독립선언 장소 가 예고 없이 태화관으로 바뀌어 당황했 다. 친구와 함께 태화관으로 달려갔다. 그는 파고다공원의 만세 함성, 종일 독 립 만세 열기로 뜨거웠던 서울 거리의 모습을 50년 후 「남대문 역두의 독립만 세」(『신동아』 1969.3)라는 기록으로 남 겼다. 필자가 『유관순-불꽃 같은 삶, 영 원한 빛』(2004)을 쓸 때 그의 기록은 화 석처럼 메말라 있던 3 · 1운동 이야기를 쿵쿵 심장 뛰는 역사로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3월 1일 독립만세 시위운동에는, 3월 3일 예정된 고종(광무황제)의 국장에 참 여하려고 상경한 20~30만 명의 지방 인 사들도 목격하고 참여했다. ‘저분들, 선 언서를 갖고 돌아가게 해야 해!’ 정석해 는 친구 박승렬, 계병호와 함께 하숙집에서 독립선언 서를 등사원지에 철필로 베껴 써서 등사판으로 등사 했다. 그는 그중 한 부를 봉투에 넣고 철산에서 학교 교사로 있는 유봉영 주소를 썼다. 그는 추적을 피하 기 위해 자기 주소와 이름은 쓰지 않고 서대문 우편 국 앞 우체통에 넣었다. 철산의 유봉영 유봉영(劉鳳榮, 호 圓峯, 1897.1.27~1985.9.25)은 서울 서대문 우편국에서 대정 8년(1919) 3월 3일 발 송을 의미하는 “서대문, 8.3.3” 소인이 찍힌 편지봉투 를 뜯어보고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철필로 한 자 한 자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어 등사판으로 등사한 독립선언서였다!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울의 정석해가 철산의 유봉영에게 보낸 등사판 독립선언서와 봉투 (독립기념관 소장) 1930년대의 철산읍 전경(황종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