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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자동차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에서의 한국 독립운동 111 은 대규모의 튼실한 회사가 있었다. 그리고 이보다 중요한 것은, 디트로이트 한인사회에는 믿을 만한 안재창과 같은 중견인물들이 많았다. 안재창은 경기도 양주군 별비면 식송리 출신으로 하와이에 이민을 왔고, 1907년 북미로 와서 1915년 콜로라도에서 한인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했 다. 안재창과 함께 회사를 운영한 조대흥은 온양 출 신이었고, 최경오는 해주가 고향이었다. 한인농업주 식회사는 1918년에 주주들에 이윤을 배분하고 해산 하였다. 그리고 안재창은 콜로라도 러벌(Lavell)이라 는 벽촌에서 사탕무우 농사를 경영하였다. 이 당시 3·1독립선언의 소식을 들은 안재창은 25달러, 그의 동지 이원식과 조대흥은 10달러씩 독립의연금을 대 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냈다. 그리고 러벌에 있을 당시 대한인국민회 러벌지방 파출위원으로 임명되 었다. 그러나 1919년 12월부터 1922년까지 덴버에 서 ‘코리안 농척회사’를 설립하여 농지 개발 회사를 경영하였다. 정안주식회사를 설립한 정양필은 사업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안재창을 초청하게 되었다. 안재창은 젊은 사업가들인 정양필과 조오흥 등을 뒤에서 성원 하였다. 그리고 정안주식회사가 1923년 봄 시카고 로 진출하였을 때, 안재창이 사장으로 정양필이 지 배인으로 동양식품회사를 경영하였다. 1928년 하와 이로 가서 18세의 박유순이란 어린 신부와 재혼을 하고 다시 디트로이트로 돌아왔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중국 동북지방)를 침략하 면서, 중가주(中加州)대한인공동회와 북미 최대의 한 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행동을 집중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디트로이트에서 도 공동회를 개최하여 회장 안재창이 미주한인연합 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미주한인연합회가 결성된 유 일한 목적은 “임시정부에 대한 의무를 일치하게” 하 는 것이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 커우공원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그로 인해 일제 당 국이 프랑스조계의 한인들을 체포할 당시 도산 안창 호도 체포되었다. 이에 대해 안재창은 신한민보사에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인도자중에 한 분인 안 도산 선생이 체포된 것은 우리 민족이 대불행입니 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안재창은 나이가 들 어서도 계속해서 정안주식회사에서 일을 했으나, 이 회사는 1951년 4월 해체되었다. 안재창은 1963년 11월 17일에 별세하였다. 국민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문화재전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미주한인사회의 한국독립운동』, 『미주한인사회 의 독립운동가』, 『권승렬 평전』, 『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연구』,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등이 있다. 필자 김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