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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7회) • 충남 예산의 독립만세시위 111 이 때문에 예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어디서나 헌병과 맞부딪혀 좌절을 겪기도 했으나, 마침내 이를 극복하고 대군중의 만세시위를 벌였다. 충남 최초의 만세시위 1919년 3월 3일 오후 5시경 예산면 예산리 음식점 권경화 집에서 이발업을 하는 윤칠영(尹七榮, 28) 등 5명이 모여 1차 한잔을 하고 8시 30분경 예산의 요 리점 명월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과 경성 등지에서 유학생 및 기타 학생이 한 국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데...” 이들의 화제는 막 시작된 독립운동 소문으로 옮겨 갔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만세를 부르세!” 시간은 밤 11시 30분경, 이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 을 더듬어서 동쪽 산 위로 올라가서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충남 최초로 울린 독립만세 소리였다. 이 소 리에 놀란 예산헌병분대가 출동하여 이들을 체포했 다. 그러나 이들 배후에 독립운동 관련 조직이 없고, 평소 생업에 종사하며 불온 과격한 언동을 한 적이 없 다는 점이 참작되어 엄중 훈계를 받고 방면됐다. 대흥면 3월 13일 오후 2시 예산읍내 남쪽에 접한 대흥면 의 동서리 대흥공립보통학교 전교생 300명이 대흥 시장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예산에서 최초 로 만세시위 다운 시위였다. 대흥헌병주재소 헌병들 이 출동하여 주도 학생 3명이 체포하며 해산시켰다. 예산 읍내 3월 9일 예산면 예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다. 3월 21일에도 시도가 있었다. 두 차 례 모두 예산헌병분대에서 사전에 이를 탐지하고 출 동하여 실패했다. 그러다가 3월 31일 예산 장날을 맞자 예산 시장에 서 약 60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예산헌 병분대와 예산군청으로 이동하며 독립만세를 불렀 다. 예수교 신자 부인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여 시 위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매일신보』, 1919.4.6).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도자 6명을 체포하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공주 수비대에서 보병 하사 이하 7명을 예산으로 파견해 경계를 강화했다. 예산이 가진 중요 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산장터 만세시위지의 오늘날 모습(독립 기념관 제공) 1913년 설립된 전국 유일의 지방은행인 예산의 호서은행 본점 건물 4월 5일 예산장날 만세시위 주도자 박대영의 공 주지방법원 판결문(국가기록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