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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북미 최초의 한인타운, 리버사이드에 ‘도산의 공화국’을 세우다 111 김인수(金麟洙)와 그의 아들들인 김용련‧김용 찬 등 김씨가족들은 1909년부터 리버사이드에 거 주하였다. 그들의 후손들 또한 1980년대 이후까 지 리버사이드에 살았다. 라버사이드의 한인역사 는 김인수 가족의 역사라고 할 정도로, 그들 가족 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이 많았다. 리 버사이드지방회의 운영에는 김인수 가족들이 모 두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재정적으로 많은 부분 을 담당했다. 이들 김씨가족들이 소장하고 있었 던 자료들은 현재 리버사이드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의 도서관에 기증이 되었다. 이들 김씨가족 자료(Kim’s Family Papers)에는 김 인수, 김용련, 김용찬 등 가족들이 납부했던 독립의 연금, 인구세, 애국금, 공채금, 의무금, 신한민보 대 금 등 독립운동자금 영수증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 어 있다. 미주 한인사회는 한인단체, 한인교회, 한인학교 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형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는 곳은 한인교회였다. 한인교회는 이민생활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곳이기 도 하지만,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정치적 장소이기 도 하다. 리버사이드에도 다른 미주지역과 마찬가 지로 한인들이 많이 살게 되면서 한인교회가 설립 되었다.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는 전담 교역자 가 없었기에 문영운, 하도원, 최재덕과 같은 교회 간 부들이 교회를 운영하였다. 상주 목사가 없었지만 로스앤젤레스의 한인목사가 순회를 하며 전도를 하 였다. 예컨대 1915년 3월에는 미국인 락글린 목사가 민찬호 목사와 더불어 설교를 하였다. 한편, 미주의 각 지역에는 국어학교 혹은 국어강 습소라는 명칭으로 한인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 치고 있었다. 리버사이드에도 많은 한인들이 거류하 면서, 리버사이드지방회에서는 한인 자제들에게 국 어를 가르쳐야만 하기 때문에 하변국어학교(河邊國 語學校)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18년 3월 당시 리버사이드 국어학교 교장에는 박일우, 교사는 최재 리버사이드 하기 국어강습소. 가운데 교사는 최재덕(1919년 3월) 리버사이드 하기 국어강습소(19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