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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4회) • 수원의 독립만세시위(4) -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2) 111 남서쪽으로 10리(약4km) 거리의 우정면 화산리(사 기말) 우정면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경이 었다. 우정면 최중환 면장과 면서기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수건으로 머리띠를 한 결사대 20명쯤이 우 정면장 최중환의 집으로 몰려갔다. 집에 없었다. 1천 5백명의 군중이 우정면 사무소를 돌과 몽둥이로 쳐 부수고 기물과 서류를 꺼내 전부 불태웠다. 화수리 주재소 방화와 순사 처단 우정면 사무소를 출발하여 한각리를 지날 때 시위 대는 2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장안리 김문명이 말 했다. “일본군이 발포하여 죽는 사람이 나오면 죽은 사 람을 밟고 넘어가 그 군인을 죽여라! 면장이 앞장서 서 지휘하라!” 지휘부는 2천 명의 군중을 두 단으로 나누어 1단 은 소나무 언덕을 넘어 동쪽으로, 다른 1단은 서쪽으 로 전진하여 주재소를 포위 공격하기로 했다. 백낙열이 외쳤다. “오늘이 밥을 마지막 먹는 날이 라 생각하고 활동하라!” 머리띠를 한 20-30명의 결사대가 앞장섰다. 오후 4시 반경 2천 명의 시위대가 주재소를 에워 쌌다. 주변에 있는 짚을 모아 벽에 쌓았다. 불을 붙였 다. 주재소 안에 있던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 郞] 순사가 뛰쳐나오며 총을 쏘아 3-4명을 쓰러뜨리 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몽둥이 든 시위대가 가와바타 를 쫓아갔다. 가와바타 순사는 뒤쫓아온 이봉구의 몽 둥이에 머리통을 맞고 쓰러졌다. 시위대는 쓰러진 가 와바타를 에워싸고 돌과 몽둥이로 치고 때렸다. 순사 를 처단한 후 일동은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순사 의 총을 맞은 장안면 사곡리 이경백, 화수리 기봉 규 가 이삼일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피의 혈전이었다. (계속)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김현희·차인범·차병한 등 장안면 만세시위자 판결문(국가기록원  제공) 화수리 순사 주재소 터에 세워진 ‘3·1독립운동기념비’(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