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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영국 런던에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다 111 환이 만난 영국 각계의 인사들은 영일동맹을 단절시 켜야만 한다고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1921년 4월 15일자로 이승만이 황기환에게 보낸 편지에도, “얼마 전 맥켄지 씨가 귀하를 극찬하는 내 용의 서한을 보내왔습니다. 우리의 대의를 위해 귀 하께서 파리와 런던에서 이룬 성과에 대해 경하하는 바입니다”라고 했다. 런던사무소와 파리위원부를 오 가며 외교활동을 하던 황기환은 1921년 6월 23일 프랑스 파리에서도 한국친우회를 결성했다. 런던과 파리에서 한국친우회가 조직된 이후 황기환은 워싱 턴회의를 준비하던 미국의 이승만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되었다. 파리위원부의 책임자로 활동을 하던 황기환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사실상 런던사무소 와 파리위원부는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이극로, 신성모의 런던 항해대학 기숙사에 유숙 경남 의령 출신인 신성모는 국내에서 대동청년단 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2년 중국 상하이(上海) 의 우쑹상선학교(吳淞商船學校)를 거쳐 난징해군군 관학교(南京海軍軍官學校)에서 무선전신을 배웠다. 중국의 해군 사관으로 있다가 베이징(北京)에 있는 무선전신학교를 거쳐 베이징 등지의 무선전신국에 서 일했다. 1920년 12월 임시정부 비밀연락처에 독 립운동자금 전달로 일제 헌병에 붙잡혀 국내에 압송 되었다. 1921년 4월 박용만이 주도해 베이징에서 열 린 ‘군사통일회의’에 통일당의 일원으로 참여해 서 무를 맡았다. 신성모는 1923년 10월 영국으로 유 학을 떠나 킹 에드워드 7세 항해대학(King Edward VII Nautical College)에 입학했다. 신성모가 영국 항해대학에 재학할 당시 독일 베 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극로가 1927년 6 월 15일 런던으로 왔다. 그는 신성모가 재학하던 항 해대학 기숙사에 들어가 신성모와 함께 유숙하였다. 이극로는 그해 11월 23일 런던대 경제학부에 정식 입학하여, 1928년 6월 영국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했다. 이극로의 『고투 40년』에는, “1927년 여름 에 내가 런던에서 처음 머물렀던 집은 항해대학 안 에 있는 기숙사인데, 이 학교는 런던 동부에 있어 그 이웃은 템스강을 사이에 두고 저편에는 그리니치 천 문대가 있고 이편에는 인도를 삼키어 먹은 동인도회 사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투 40년』에 있는 것과 같이 항해대학 근처에는 그리니치 천문대와 영 국 동인도회사가 있다. 국민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문화재전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미주한인사회의 한국독립운동』, 『미주한인사회 의 독립운동가』, 『권승렬 평전』, 『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연구』,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등이 있다. 필자 김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