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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⑤ 111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명동성당을 대표하는 노기 남(1902-1984) 주교는 1942년 1 월 프랑스 선교사 출신의 라리보 (Larribeau, 元亨根) 주교를 대신 하여 조선인 최초로 제10대 서울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 때 를 전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 거나 집회를 주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교단의 협력을 주도한 인물이다. 사실 일제강점기 명동성당의 부끄러운 역사는 1890년부터 1932년까지 43년간 한국 가톨릭 의 수장(제8대 조선교구장) 역할 을 했던 프랑스 선교사 뮈텔 주교 (Mutel, 1854~1933)로 올라가야 한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한 안중근(세레명 토마스)에 대해 살인자라는 이유로 천주교 신자 자격을 박탈하였고, 천주교 의식 인 종부성사마저 거부하였다. 그 는 무관학교 수립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고 있던 안명 근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겸 조 선주차헌병대 사령관 아카시 모 토지로[明石元二郎]에게 밀고한 인물이기도 했다. 뮈텔의 이러한 처신은 3·1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3·1운동의 결 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한 내 무총장 이동녕은 「천 주교 동포여」라는 제 목의 문서(통유 제1호, 1919. 10. 15)를 발표 하여 천주교와 천주교 도를 질타하기도 했다. 지난 2019년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을 맡고 있던 김희중 대주교가 교계를 대표 하여 발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는 한국천주교의 역사적 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 하다. 그는 “백 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 동에 나선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면서 “그 역사의 현장에 서 천주교회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하였다. 나아가 “외국 선교사들로 이뤄진 한국 천 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 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 해야 한다는 정교(政敎)분리 정책 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 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 동 참여를 금지”하였고, “나중에 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 참배를 권고하 기까지 하였”다고 반성하였다. 과 거사를 직시하면서도 이를 회피하 지 않고 뼈저린 반성과 사과를 한 한국천주교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 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의거터 표석과 명동성당(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