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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2024년 9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운동에 참여한 주민들 중에는 체 포되어 재판을 받은 인물의 실명 과 주소도 다수 확인된다. 특히 구 파발리(신도면)에서는 만세운동 이 3월 29일까지 지속되었다. 은 평구에 이를 기념하는 표석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다. 연희전문 학생대표, 고은(高恩) 예배당 전도사 이병주 역촌리 ‘고은예배당’의 전도 사로 있던 이병주(1894~1971) 는 1919년 3·1운동 당시 김원벽 과 함께 연희전문 학생대표로 활 동한 인물이었다. 이병주는 3월 5 일의 남대문시위를 주도한 후 관 련 소식과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 는 내용, 이후 계획 등을 담은 전 단을 제작하여 정동길에서 배포 하던 중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 정에서 판사 나가시마[永島雄藏] 가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독립운 동을 할 작정인가”라고 묻자 “그 렇다.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 겠다”라고 당당하게 답변했다. 그 는 1년 2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 살이를 한 후 의주 동암산에 근 거지를 둔 항일무장단체 ‘대한독 립보합단’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을 계속하던 중 발각되자 상하이 로 망명하여 태평양회의 외교후 원회 서기,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맡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역촌 리 고은예배당은 아더 베커 목사 (1875~1974)가 활동한 곳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박노수 집터 경북 의성 출신의 박노수(1907 ~1986)는 해방 이후 역촌동(22- 48)에 살다가 서거한 독립운동가 이다. 박노수는 1920년대 청년운 동 단체인 학생구락부·경성청년 회 등에 가입하여 항일민족운동 을 펼쳤고, 1927년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 전문부에 입학한 후 에는 전진한·함상훈 등과 함께 민 족협동전선인 신간회 동경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경찰에 투신하기도 했던 박노수(1948년 총경으로 퇴 직)는 1956년에는 진보당 창당, 1960년에는 사회대중당 창당에 도 참여하는 등 혁신계 정치활동 에 매진한 인물이기도 했다. 역촌리 출신의 사회주의계 독립 운동가 김점권 김점권(1907~?)은 고양군 은평 ➍ 은평한옥역사박물관 ➎ 윤기섭기념비 앞면. 새겨진 글자가 선명치 않다. ➎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