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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칼럼 • 3대를 가지 못한 7·4남북공동성명: 북한은 냉전 시대의 ‘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다 11 미군도 ‘외세’에 속한다는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냐는 물음이 뒤따른 것이다. 이 부 장 그리고 한국 정부는 그러한 일련의 해석들 을 배척했다. 그렇지만 특히 유엔과 관련해서 는 논란이 계속되었다. 둘째,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관해서다.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다” 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한다는 뜻이 냐?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국체(國體)의 근본 을 흔드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반(反)국가적 자 세가 아니겠느냐는 심각한 문제 제기가 뒤따 랐다. 종합적으로, “방북한 이 부장이 북한의 고 압적인 또는 위협적인 행태에 눌려 북한이 하 자는 대로 따라간 것 같다”라는 말도 나돌았 다. 실제로 북한은 7월 4일 당일의 『로동신문』 에서, 김일성 수상의 제의를 이후락 부장이 모 두 받아들였다고 대서특필했다. 북한식 철자 법 그대로 옮기면,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3대원칙 제시」 라는 큰 제목 아래,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께서 평양에 온 남조선중앙정보부장 리후락을 만나시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조국통일의 3대원칙을 리후락이 전 적으로 지지 」 라는 부제를 달았다. 박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온 이 부장에게 불 만을 표시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김 정렴(金正濂)의 회고록, 총무처 장관이던 이석 제(李錫濟)의 회고록, 대변인이던 김성진(金聖 鎭)의 회고록 모두 박 대통령이 이 부장의 보고 를 받고 못마땅하게 여겨 ‘책망하셨다’라고 썼 다. 국무총리이던 김종필(金鍾泌)의 증언록은 박 대통령 앞에서 자신이 남북공동성명의 내용 에 불만을 제기하며 이 부장과 심하게 다퉜다 고 썼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언론인 천관우(千寬宇) 동아일보사 이사는 ‘복합국가론’을 제시했다. 남과 북이 각각 지향해온 ‘사상과 이념을 뛰어 넘어’ 그것들을 모두 수용하는 ‘복합국가’를 지 향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 아가, 전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張俊河)는 ‘통 일지상론(統一至上論)’을 제시했다. 통일이라 면 그 어느 이념과 형태 아래서라도 좋다는 뜻 이었다. ‘7 · 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 모두 개헌 등 독재권력 강화 이렇게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박정희 대 통령은 7·4공동성명으로부터 약 100일 뒤인 1972년 10월 17일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함과 동시에 유신체제의 출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기자회견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