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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렬사 나고 자라난 고향이다 대한민국정부 감찰위원장 정인보는 짓다 경동공립중학교 교사 김충현은 쓰다 왜적이 우리를 짓밟고 또 중국을 노리여 우리 독립선언 한 지 13년 서력 1932년 일월에 상해를 초격하야 중국 19로군의 장렬한 항전으로도 마츰내 부지하지 못하니 소위 송호협정은 중국사억만의 참울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해 4월29일은 적의 경일이라 전승한 자랑과 아울러 상해가 축하 속에 싸히던 지음에 정오 거의 되자 대지가 뒤집히는 큰 폭음이 나며 홍구공원 경축대에 모아있던 적의 육해군수령공사 총령사 걱구러지고 쓰러지고 눈빠지고 다리 부러지고 한 사람도 버서난자가 없었다. 적은 중국 사람을 의심하얐으나 얼마 아니하야 대한사람 윤봉길 이름이 온 세계에 퍼지었다. 우리는 어대서든지 우리의 적을 죽이는 것이 의다. 중국만을 위하야 원수를 갚아준 바 아니엇마는 중국은 렬사의 의를 더욱 고마워하야 바릇 전 서울 평양에서 적의 이간에 넘어서 중국 상민을 박해한 일로써 두 민족 사이가 자칫하면 험악할 뻔 하게 되던 것 까지 구름 걷히듯 하고 우리독립에 큰 힘을 아끼지 아니하고저들 하얐으니 장중정총통이 우리독립을 선창할 때도 윤봉길렬사의 저 때에 던지던 폭탄 소리가 귓가에 새로웠을 줄 안다. 렬사가 스물다섯에 이 일을 하고 이듬해(그해) 12월 19일 적의 땅 대판에서 적의 총에 의로운 일생을 맞추었다. 김백범선생이 입국하면서 덕산 시랑리 렬사의 집을 찾어가서 제사하고 그 뒤 대판으로부터(가나자와) 유골을 찾어다가 국장의례로 리봉창 백정긔 두분과 나란히 효창공원 구광 뒤에 봉장하얐다. 이제 례산군 교육회에서 중소학생의 정성을 모아서 렬사의 고향에 비를 세우니 우리나라에 우리정부가 선 이듬해다. 렬사가 살아계셨다면 겨오 마흔넷이다. 대한민국31년4월이십구일에 세우다 김수렬 각 충청남도례산군교육회 충청남도선렬유적표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