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page


109page

임창모(林昌模)는 임창모는 황해도 은율군(殷栗郡) 일도면(一道面) 누리(樓里)에서 출생하였다. 10세까지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5세에 진명학교(進明學校)에 입학했다. 17세에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다가 20세에 그만두었다. 임창모는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학교(信聖學校)에 입학했다. 1919년 신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했다. 2월 26일 신성학교 교사인 김지웅(金志雄)이 4학년 학생이던 고병간(高秉幹), 3학년 김봉성(金鳳性) 등을 불러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를 복제하게 했다. 임창모 등도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학교 기숙사인 캐롤린 홀 4층 지붕 밑에 비밀실을 설치하고 등사판으로 ‘2·8「독립선언서」’를 찍어내고 태극기도 만들었다. 그리고 “대호! 조선청년”이라고 큰 글씨로 쓴 깃발을 만들었다. 3월 1일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선천읍내 군청과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시가를 돌았다. 그런데 일본군이 발포하여 교사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고, 만세시위 현장에서 1백여 명이 검거되었다. 임창모는 이때 검거되었다.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출옥 이후 평양의 숭실대학(崇實大學)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922년 9월 21일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1925년에는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동명학원(東明學院)에서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3월 1일 독립선언기념일에 ‘백년(百年)의 공(功)’이라는 연극에 출연하여 참석자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임창모는 1926년 4월 21일 린큰호를 타고 미국에 갔다. 1927년 3월 1일 동명학원 북미지회의 회원 자격으로 대한인국민회를 대상으로 중국에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청년 지원을 요청했다. 1929년 흥사단에 몸담았다. 1931년 미주 흥사단 제3반(시카고) 반장이 되었다. 1927년 로스앤젤레스 성경학원에서 수학했다. 1929년 미조리대학 화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1933년 시카고의 루이스대학에 들어갔다. 1933년 7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영업부장이 되었다. 1934년도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중서부 연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서기에 뽑혔다. 1934년 8월 학무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했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7월 17일 시카고에서 시국 토론회가 개최되었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옹호하기로 결의하고 실행위원을 맡았다. 안창호가 국내에서 서거하자 1938년 3월 20일 시카고 한인교회에서 추도문을 낭독하였다. 중국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자, 시카고지방회에서는 한국광복군 성립 축하식을 거행했다. 임창모는 로스앤젤레스와 캔사스를 중심으로 찹수이(chopsuey) 도매업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1928년부터 1945년까지 각종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 1967년 7월 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73세 나이로 서거했다. 잉글우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