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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0회) • 황해도 안악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1) 109 씩만 생겨도 이 나라의 문명은 10년 안에 일본을 따 라잡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지역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국망 직후인 1910년 11월 안중근 의 사 사촌 동생 안명근(安明根)이 남만주의 서간도(西間 島)에서 들어와 황해도 부호들로부터 무관학교를 세 울 자금을 모집하다 붙잡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이 른바 ‘안악사건’이라 하여 조선총독 암살미수사건으 로 조작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였고, 이 사건은 곧 서북지역 애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1919년 3월 1일 황해도에서는 황주, 사리원 등 여 러 곳에 예수교와 천도교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배포 되었고, 곧바로 여러 지역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 났다. 안악군 최초의 독립만세 시위 움직임은 3월 9 일 안악면 평정리에서 있었다. 그러나 계획이 탄로나 시위가 무산되었다. 은홍면 본격적인 대규모 시위운동은 3월 11일 안악군의 내륙 은홍면에서 일어났다. 1900년대 초에 설립된 은홍면 온정리의 사립 선명학교(善明學校) 교장이자 학산리 기독교인인 박치간(朴致幹)과 정계로(鄭啓老, 35세, 농업), 정홍로(鄭弘老, 44세), 이문욱(李文旭, 36 세 농업), 고병국(高炳國, 22세, 농업), 유용준(柳龍俊, 22세, 농업) 등은 3월 3일 광무황제 고종 국장에 참여 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돌아와 고향 은홍면에서도 교회 가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은홍면은 안악군 서부의 교통 중심지였고, 면 소재 지인 온정리는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일제는 사 람들의 왕래가 잦은 온천리에 헌병 주재소를 설치 하 고 한국인들을 감시, 통제해 왔다. 이들은 3월 11일 은홍면 온정리 장날을 거사일로 잡고, 학산리(鶴山里) 유용원의 집에서 만세 시위 계 획을 위한 비밀 모임을 했다. 이들은 태극기와 “대한 독립” 깃발을 제작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 다. 또한 은홍면과 인접한 안악군 북부 대행면(大杏 面)과 서하면(西河面) 등 세 개의 면에 있는 여러 교회 에 연락하여 3월 11일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3월 11일 오전 11시경 주변 각 면에서 모인 기독 교인을 중심으로 한 수백 명이 온정리교회 앞에 모였 다. 박치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시위대는 정의 1893년 설립된 안악장로교회     황해도의 기독교 선교에 앞장선 미국 북장로회 재령선교부 선교사 들(기독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