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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세계평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다, 브뤼셀 109 위반임을 확인하며, 일본의 행동 중단을 권고하였 다. 선언문은 충돌하는 쌍방의 중·일 간 직접 협상만 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를 도출할 수 없고, 주 요 관련 강대국과의 협상만이 실현될 수 있으며, 적 대행위를 중지하고 평화 수단을 강구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러나 9개국 조약회의에서는 일본에 대한 실질적인 제재 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1922년 에 마련된 워싱턴체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중일전쟁 때문에 9개국 조약회의가 벨기에 브뤼 셀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에서는, 9개국 조약회의(구국공약회) 의장에게 한국 광복운동단체 연합선전위원회 명의로 호소문을 제 출하기로 하였다. 연합선전위원회 주임 조소앙은 1937년 10월 26일 「 호소문」 을 작성하여, 파리에 있 는 서영해에게 보냈다. 이 「 호소문 」 에서 한민족을 대 표하는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선전위원회는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해 무력 제재를 해야만 중국의 영토 보존과 한국의 자주 독립을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서영해에게 「구국공약 회 의장에게 보내는 호소문 」 을 보내, 그것을 프랑스 어로 번역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는 서 영해를 브뤼셀에게 개최되는 9개국 조약회의에 참 석하라고 하면서 11월 3일 여비로 200원을 보내주 었다.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은 서영해는 처음에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의 국제회의나 국제연맹 회의가 결과가 세계 외교의 ‘서울’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에서 미리 정해지기 때 문이다. 서영해가 회의 참가를 주저하고 있을 때, 11월 8 일 임시정부에서 다시 9개국 조약회의에 참석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서영해는 9개국 조약회의 에 참석을 결심하였고, 11월 10일에 브뤼셀에 도착 하였다. 그런데 9개국 조약회의의 분위기는 반수 이 상의 대표단이 일본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았고, 일 본의 조약 위반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서영해는 임시정부 대표 명의 혹은 신문기자 자격으로 각 개인과 단체를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펼쳤다. 11월 15일 일본의 조약 위반에 대해 이탈리아는 반대하고,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은 불 간섭 태도를 보였다. 서영해는 1937년 11월 10일부터 9개국 조약회의 가 끝날 때까지 회의에 참석하였고, 회의가 끝난 이 후 벨기에 리에주(Liege)·루뱅(Louvain) 두 곳에서 태평양 문제 강연을 하였다. 강연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와서, 12월 3일 서영해는 임시정부에 9개국 조 약회의 참석보고서를 보냈다. 국민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문화재전문위 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미주한인사회의 한국독립운동』, 『미주한인 사회의 독립운동가』, 『권승렬 평전』, 『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연구』, 『일왕을 겨 눈 독립투사 이봉창』 등이 있다. 필자 김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