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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희생자 위령비. 뒷면에 적힌 38인은 모두가 박사동 한마을 주민으로 1949년 11월 19일(음력 10월 10일) 밤 9시 무장공비의 습격으로 처참한 죽음을 당한 반공애국인사이다.
8.15해방에서 5년여 신생 대한민국이 독립한지 1년 남짓 비록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나 독립국이 되었다해서도 좌우의 사상적인 대립으로 극히 혼란하였음 발판을 잃은 좌익들은 끝내야 무장공비화하였다. 그들로하여 산촌마을들은 그들의 끊임없는 내습으로 인하여 불안 공포 속에서 그 하루를 편히 지낼 수가 없었으며 청장년들은 반공에 앞장서서 내 고장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싸웠다. 1949년 10월 15일 나무하러 팔공산 퍽정 양시골에 간 주민이 공비의 본부를 발견하여 경찰당국에 신고한 바 군경합동토벌작전으로 공비 78명을 사살, 7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잔존공비 수명이 운문산 공비에게 연락 합셓여 11얼 29일 밤, 수 미상의 많은 공비들이 박사동을 습격했다. 장총 큰칼 죽창 등으로 반공청장년 38명을 살해하고 28명에 중상을 입혔으며 가옥 108동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해 갔다. 이 처참하고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인하여 미물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자식 잃은 부모, 남편 잃은 부인의 울음으 바다가 되어버렸다. 이 얼마나 끔직한 민족의 비극인가. 세월은 흘러 마을은 다시 일어섰고 진산 8공은 의구하다지만 어찌 그 아프고 따갑던 사실을 잊을 수가 있으랴. 1961년 9월 군내의 뜻있는 분들이 그날 희생한 분들을 위령하고 구분들의 반공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대동국민학교 뜰에 돌을 세웠다. 그 후 글이 마멸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픅 하고 있던 차 염길정국회의원의 공약과 경산군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뜻있는 지방인사들의 아낌없는 협조로 다시 이 비석을 세우는 바이다.
조국통일의 민족적 여망은 기필코 이뤄지겠지만 그날을 위해 오로지 화합과 단합으로 반공하여 이 땅에 뿌린 고귀한 인사들의 피에 보답해야 할 일이다. 1985년 11월 29일 반공희생자위령비 건립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