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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의 독립전쟁과 국내진공작전┃105 역사는 과거사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심과 노력의 반영이자, 그 결과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과거의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역사를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 현재의 시대상을 투영한 과 거의 진실’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동시에 바람직한 미래를 창 조하기 위한 지성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덧 광복 70주년이 지났지만, 남과 북의 대립과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도 그칠 기 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진행 중이다. 우리가 일제침략자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의 역사, 남과 북이 함께 추모하고 기리고 있는 안중근 의사,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남과 북을 연계하고 통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역사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제2차 흥경성 전투 1932년 6월 18일, 만주국군 연합부대는 무 순을 출발하여 목기하를 거쳐 영릉가를 점령 한 후 그 여세를 몰아 흥경성을 공격해왔다. 요녕민중자위군 이춘윤 부대와 조선혁명군 조 화선 부대가 쌍용사 뒷산에서 완강하게 막았 으나 적군의 비행기의 폭격으로 후퇴할 수밖 에 없었다. 일본군 비행기는 목기하, 영릉, 흥경현성을 무차별 포격을 가하여 상점과 민가들이 불에 타고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하는 등 온천지가 불바다가 되었다. 조화선 부대는 오후 3시 양세봉 지원부대의 도착을 기다려 흥경 시가전을 전개하였으나 병 사의 수와 화력에 차이가 커서 작전상 후퇴를 결정하고 왕청문으로 철수하였다. 왕청문에서 재정비를 마친 한중연합부대는 흥경성을 공격하였다. 양세봉은 후창촌 일대 북부지역, 이춘윤 부대는 왕개산 남부, 대도회 의용군은 동부를 공격하였다. 일본군과 만주국 연합군은 저지선을 치고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한중연합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청원현 지역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조선혁명군의 전력을 가볍게 보고 무리한 공격으로 달려드는 일본군에게 흥경성 일대 지리에 익숙 한 혁명군은 이를 유인하여 1시간 동안 집중포화를 퍼부어 격퇴시켰다. 혁명군은 일본군을 추격하며 돌격 전 을 감행하여 일본군 30여명을 사살하였으며,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영릉가와 상협하(上夾河)를 점 령하였다. 한중연합군은 제 2차 흥경성 전투에서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 조선혁명군 본부. 흥경현(신빈현) 왕청문진, 조선혁명군 주둔지 왕청문진 향수하자촌 조선혁명군 흥경성 전투 유적지(요녕성 무순시 신빈현(좌) 왕청문 중앙대로) 조선혁명군 흥경성 전투 유적지(요녕성 신빈현버스터미널 일대) 역사의 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