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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남미 페루 리마, 홍언의 한국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107 검관의 종루가 석양 햇살을 띄고 있어 劒館鐘樓帶夕暉 산옹의 유적이 외려 아련하다마는 山翁遺蹟尙依稀 태평한 이제는 오가는 사람조차 없어 昇平此日無人到 지는 낙엽 푸른 이끼 속 사립문만 반쯤 닫혔네 黃葉蒼苔半掩扉 (* ‘산옹’은 ‘산 마르틴’을 음차한 것임) 페루의 독립관은 리마(利馬)의 북쪽 와조[華造, Huacho]에 위치해 있다. 1824년에 아르헨티나[雅 爾燕]의 정인(丁人) 산 마르틴(山馬丁, José de San Martín)이 리마를 거처 와조에 이르러 스페인[西班 牙] 군대를 크게 이기고 드디어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와조에다 ‘독립관’을 짓고 자유종과 산 마르틴의 유적을 이곳에다 보관하여 기 념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페루가 독립하고 100년이 되도록 페루 사람들이 보수를 하지 않아서 한 나라 의 존영(尊榮)의 소재지가 퇴파(頹破)하여 보는 이의 눈에는 황량함만 가득하였다. 때마침 가을이어서 낙 엽이 어지럽게 날려 그 쓸쓸함을 더함으로써 관람하 는 사람으로 하여금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게 하 였다. 홍언은 『신한민보』 1938년 10월 13일자에 「웨스 트 버클리 꽃동산에서」라는 글에서, “나는 이 한 송 이 야련화를 보고 이윽이 생각함이 있었나니. 이 꽃 은 일찍이 남미주 페루 잉카제국 고궁에서 보았던 것이라. 그곳 옛 늙은이들이 말하기를 잉카황제는 그 나라가 망하여 궁궐을 떠날 때에 그 사랑하는 황 후와 같이 마지막 후정의 백년화를 돌아보며 눈물을 뿌렸다”고 적고 있다. 홍언은 페루 잉카제국의 마지 막 수도가 있었던 쿠스코(Cusco)까지 여행하였다. 홍언, 남미의 끝 칠레에서의 활동 페루 리마에서 중국인들에게 한국독립운동 의연 금을 모집하던 홍언은, 1921년 12월 초순에는 칠레 이키케(Iquique)에 도착하였다. 홍언은 페루에서 칠레의 북부지방 이키케로 들어와 중부지방인 안토 파가스타(Antofagasta) · 탈탈(Taltal), 남부의 발파라 조(Valparaiso)를 거쳐 칠레 중부에 있는 수도 산티 아고(Santiago)까지 내려가게 된다. 홍언은 먼저 이 키케 안에 있는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 분부(分部) 로 찾아갔다. 중국국민당 이키케 분부에서는 분부 부장 정협민(鄭俠民) 등의 간부를 만났으며, 이들로 부터 칠레 은(智銀) 8천원과 공채 2천원을 의연받게 되었다. 이키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거둔 홍언은 12월 30 일경 칠레 중부의 안토파가스타에 있는 중국국민당 분부로 찾아 갔다. 그는 안토파가스타 분부 부장 완 길남(阮吉南)과 재무겸 서기 등석(鄧錫) 등의 간부를 만나 한국 독립 의연금을 받았다. 이키케에서 칠레 의 수도인 산티아고까지 방문하였지만 소기의 성과 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칠레의 이 키케에서 배를 타고 “1월 보름쯤[望間]”에 페루의 리 마로 귀환하였다. 홍언이 칠레에서 페루 리마로 돌아온 이유는, 칠 레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 자금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곳 화교(華僑)들의 경제적 상황도 좋지 않았지만, 그 보다는 당시 칠레 화교들의 정치적 동향 때문이 기도 했다. 당시 쑨원[孫文]이 ‘북벌(北伐)’을 위해 재 외에 있는 화교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칠레에서도 이 같은 풍조가 극렬하게 일어나 다른 일에 자금을 지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