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page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 ‘한인비행가양성소’가 창립된, 북가주 윌로우스 107 코에 왔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쉽게 배워, 1909년 4 월 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창립된 이후 한인들을 위 한 통역을 맡았다. 1912년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멕 시코지방회의 외교원으로 활동하면서 스페인어를 알지 못하는 동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14 년경 미국으로 건너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하였 으며, 1916년부터 윌로우스에 정착했다. 1917년에 윌로우스에서 사탕무우 농사와 벼농사를 시작하여 평생동안 농부로 살았다. 1919년 1월 백신구의 딸 백광순과 결혼하여, 벼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윌로 우스에서 이흥만 부부는 4,500에이커의 대규모 농 장을 경영했기 때문에, 100여 명이 넘는 인력을 고 용하였다. 이흥만의 농장에는 다양한 일꾼들이 있었 지만, 이흥만이 스페인어를 잘 구사할 수 있었기 때 문에 멕시코인 노동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흥만 농장은 1920년 전후 공황으로 쌀값이 폭락하면서 유타주로 이주하여 사탕무우 농사를 하였다. 워싱턴에 있던 이승만이 워싱턴회의가 끝난 후인 1922년 3월 4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고, 다음날 부터 북가주지역의 동포들을 심방하였다. 이승 만이 윌로우스에 왔을 때, 이흥만의 낡은 집에서 묵었다. 그후 이흥만은 이승만의 충실한 동조자가 되었다. 윌로우스에서 평범한 농부로 지내다가 갑자기 건 강이 좋지 못하여,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그 후 여러 곳으로 옮겨다녔고, 1940년대에는 휘티어 (Whittier)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흥만은 거의 평생 을 농부로 살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의연 금, 임시정부후원금, 광복군후원금, 독립금 등의 독 립운동자금을 냈다. 이로 인해 우리 정부로터 독립 유공자(2021년 대통령표창)로 서훈이 되었다. 이흥만은 북미에 온 한인과는 다른 이력을 가졌 지만 농부로 평생을 살다가, 1975년 6월 29일 83 세로 별세하였으며 잉글우드공원묘지(Inglewood Park Cemetery)에 묻혀 있다. 이흥만의 부인 백광 순(Mary Paik Lee)은 『Quiet Odyssey: A Pioneer Korean Woman in America』(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0)라는 회고록을 썼다. 이 회 고록에 그녀의 아버지 백신구와 가족들의 이민사, 남편과의 윌로우스 생활을 생생하게 남겼다. 국민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문화재전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미주한인사회의 한국독립운동』, 『미주한인사회 의 독립운동가』, 『권승렬 평전』, 『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연구』,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등이 있다. 필자 김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