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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9회) • 경기도 광주군 만세시위(2) 107 로 행진하여 나아갔다. 주재소 헌병들이 뛰쳐나와 해 산을 명했다. 시위대는 듣지 않고 헌병대를 에워쌌 다. 1천 명의 시위대가 해산에 불응하며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부르자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시위대는 투석으로 맞섰으나, 총격 앞에 대 적할 수 없었다. 사망자 2명 부상자 10여 명이 발생 하고 8명이 검거되었다. 구천면의 한 34세 농부는 턱 에 총을 맞아 턱뼈의 상당 부분이 날아가는 중상을 입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밤에는 동부면과 서부면 산 위와 남한산성에서 봉 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포면과 경안면 3월 28일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조선군 사 령관은 광주군의 남부 오포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 은 긴급 전문을 상부에 타전했다. “광주군 오포리 및 주막리에 약 1,000명의 폭민이 봉기하여 폭행하므로 보병 제79연대로부터 원조를 받아 진압했는데 약간의 사상(死傷)이 있었다.” 이날 오포면에서는 새벽 1시경부터 독립만세 소리 가 새벽을 깨우며 울려 퍼졌다. 오포면 추자리 농민 정제신(鄭濟莘)은 오포면 고산리 주민 약 40명을 이 끌고 고산리 뒷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비슷한 시간에 오포면 문형리의 농민 김인택(金仁澤) 과 임무경(林武京)도 문형리 주민 약 30명과 함께 마 을 부근 산 위에 올라가 화톳불을 피우고 조선독립만 세를 외쳤다(정제신 판결문, 김인택 등 2명 판결문). 오전 9시경 광주군 오포면 면사무소 앞에 기독교 인, 천도교인과 일반 주민 약 600명이 집결했다. 이 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는데, 오포면 문형리 구장 박상진(朴商鎭)이 제지하고 나섰다. “이런 놈이 어디 있나!” 그는 시위대에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오포면 양벌리에 사는 농민 유면영(柳冕永)이 외 쳤다. “광주 군청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헌병들이 발포 옛 광주군청 자리(현재 경안동사무소) 원경(독립기념관 제공) 광주군 중부면의 1971년 당시 모습(현재 성남시 수정구 · 중원구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