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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6회) • 함경남도 단천의 만세시위 107 김용문이 기억하는 파도면 만세시위 사망자 10명 은 다음과 같다. 염석하(廉錫河) 염석한(廉錫漢) 박홍선(朴弘善) 이 종환(李鍾煥, 이상 新滿面), 이영호(李永浩) 원준희(元 俊喜, 이상 何多面), 서봉화(徐鳳化, 福貴面), 김상갑 (金尙甲, 利中面), 황희율(黃熙律) 황희종(黃熙種, 이상  北斗日面) 북두일면 만세시위 단천군 북단 북두일면에서는 3월 15일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 읍내에 사는 천태종(千泰鍾)이 천도교 교인 권명주(權明周)를 통하여 단천군 북두일면 대신 리의 황희종(黃熙鍾)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여 3 월 20일 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3월 19일 북두일면 용양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 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대신리 헌병주재소 헌병 들이 사전에 이를 탐지하여 즉각 탄압히여 독립만세 시위에 이르지 못했다. 아마 이 때문에 경계가 삼엄 하여 예정했던 3월 20일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못했 을 것이다. 그러나 이틀 뒤 일어났다. 3월 22일 오전 7시경 북두일면 신덕리에서 임용선 이 천도교 교도, 주민들에게 전투적인 행동지침을 전 달했다. ‘① 헌병의 해산 명령에 응하지 말 것, ② 체포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 ③ 한 사람이라도 체포를 당하면 모두 일어나 탈출시켜 구조할 것, ④ 대신리 신복장에 서 만세를 부른 후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유치중인 사람들을 탈출시켜 구조할 것, ⑤ 만약 헌병이 방해하 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반드시 실행할 것’ 오후 1시 5~600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앞세우 고 대신리 신복장을 거쳐 헌병주재소 앞으로 나아가 조 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들은 해산을 명했으나 듣 지 않자 총기를 발포했다. 7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 상을 입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북두일면 김성호 등 경성복심법원 판결문(국가기록 원 제공) 단천군 대동리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