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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북미 최초의 한인타운, 리버사이드에 ‘도산의 공화국’을 세우다 107 을 지어서 한인들이 모여 살 수 있게 하였다. 파차파 마을의 한인들이 정결하게 생활하는 것을 본 북미지 방총회장 강명화는, “도산 선생의 공화국이 참으로 훌륭하군”이라고 감탄을 하였다(박현환, 『속편 도산 안창호』, 삼협문화사, 1954, 124쪽). 파차파 1532번지는 한인 노동자들의 노동주선 소이기도 하지만, 도산 가족의 생활 공간이기도 하 였다. 리버사이드에 노동주선소가 설립되면서 여러 곳에 있던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파차파 1532번지는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지방회의 회 관으로 사용되어, 북미의 모든 한인들은 이 건물을 하나의 성지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17 년 이후부터 리버사이드에 한인들이 급격하게 줄어 들었다. 그 이유는 리버사이드 주변의 레드랜드, 업랜드, 크레어몬트 등 농장지대에 새로운 한인사회가 새 로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와 샌프 란시스코와 같은 대도시로 가서 식당이나 상점 을 운 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노동조건과 일자리 가 훨씬 많은 중가주(中加州) 지역으로 가기도 하였 다. 1918년 1월 당시 리버사이드에는 성인남자 15 명, 부인들이 10명, 아이들이 20명으로 도합 45명 정도의 한인들이 거류하고 있었다. 이전에 비하여 많은 한인들이 리버사이드를 떠났다. 이렇게 되자, 1918년 1월 북미지방총회의 발상지인 파차파 애비 뉴 1532번지의 국민회관은 문을 닫고 말았다. 현재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애비뉴 1532번지는 주소조차 도 없고, 코머스 스트리트(Commerce Street) 4430 번지로 변해 버렸다.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지방회의 조직 리버사이드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는 샌프란시스 코에서 1905년 4월 5일 정식으로 공립협회를 성립 시키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도산은 북미 각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Korean Presbyterian Mission)의 한인 교인들 공립협회 리버사이드지방회 보고(『공립신보』  1906년 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