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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조선혁명군의 청원현 전투 영릉가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 기세를 몰아 6 월 15일에 대부대를 동원하여 흥경현과 청원현을 동시 에 공격하여 왔다. 조선혁명군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 휘하에 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여 명의 병력 으로 흥경성을 사수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한중연합군 주둔지 및 전투지(신빈현(좌) 통화현(우) 유적지) 조선혁명군 청원현 전투(좌) 흥경성 전투(우) 유적지 항일독립전쟁의 역사는 국망국치의 시대, 일제강점기 국난극복의 투쟁사일 뿐만 아니라 신냉전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통찰과 지혜를 일깨우는 시대의 가장 귀중한 사료이다. 독립전쟁의 역사는 살아있는 진실이다. 흥경성 전투 공방전 ▶ 제1차 흥경성 전투 일본군은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 세력을 일거에 토벌하기로 하고 만 주국군과 연합하여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흥경성을 향하여 진격하여 왔다. 1932년 5월 18일, 일본군의 군사 계략을 탐지한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은 중국의용군과 합세하여 부대를 인솔하여 흥경현 남쪽고지 에 도착하여 병력을 배치한 후 적 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흥경성 북쪽 청원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하여 왔다. 박격포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은 상당히 치열하였다. 흥경성 일대 지리에 밝은 조선혁명군은 선두에서 일본군 공격을 격퇴하였고, 일본군은 상협하를 거쳐 청원현으로 후퇴하였다. 흥경성 1차 전투가 갖는 의미와 성과는 한·중연합군이 협동작전을 벌여 이룩한 승리를 통해 양 민족이 항일공동운명체라고 의식을 높여 주게 되었으며 정신적 유대가 공고하게 다져졌다는 것이다. 조선혁명군은 요녕민중자위군,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경 및 만주국군을 상대로 10월까지 200 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다수의 일·만군을 무찔렀다. 특히 이 시기에 벌인 신빈현 전투, 흥경현 진주령 에서의 일본군 열차 습격전투, 통화현 쾌대무자 전투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용맹을 떨친 전투 로 유명하다. 양세봉은 그를 따르는 독립군 장령과 동포들로 부터 ‘군신(軍神)’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유능 한 사령관 및 철저한 동포의 보호자로서 신망을 얻었다. 무순현 전투 1932. 9.15. 상협하 전투 1932. 3. 13. 청원현 전투 1932. 8. 21. 산성진 전투 1933. 7. 23. 영릉가 전투 1932. 3. 11. 1933. 5. 8. 흥경현 전투 1차 : 1932.5.18. 2차 : 1932.6.19. 3차 : 1933.9.5. 북사평 전투 1932. 3. 11. 동창대 전투 1932. 5. 20. 조선혁명군 간부회의 1934. 4. 대황구 조선혁명군 본부 왕 청 문 관가보자 전투 1934. 8. 27. 팔리전자 전투 1934. 7. 23. ▶ 조선혁명군 전투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