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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헤이그에서 을사늑약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다 107 장되었다. 유해가 묻혀 있던 자리에는 이준의 흉상 이 세워졌고, ‘일성이준열사의 묘적’ 이라 새긴 비석 이 건립되었다. 헤이그에서 한국특사들의 외교활동 소식이 전해 지자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7월 18일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를 서울로 불러들여 광 무황제에게 헤이그 특사의 책임을 추궁하며 강제로 퇴위시켰다. 한국특사 이상설과 이위종은 구미 각국 순방외교를 마친 이후 1908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 각 지역의 한인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1908년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 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하였다. 헤이그 한국특사의 역사적 의의 헤이그 한국특사들은 일제의 방해와 열강의 대표 들로부터 냉대받으면서도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 효임을 알렸다. 그런 가운데 1907년 7월 14일 이준 특사가 사행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돌연 순국하고 말았다. 일제로부터 감시의 눈을 피해 우여곡절 끝에 헤이그에 당도하여 당당하 게 외교활동을 펼쳤지만, 이국 땅에 원통하게 숨을 거두었다. 대한의 국권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아서 훅 불면 꺼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속에서, 만국 평화회의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외교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은 파란과 역경의 역사였다. 일제를 상대로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다. 한국인들에게 일제의 야만 적 탄압과 학살 만행 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여 한 국의 자유와 독립의 정당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는 ‘국제회의’ 뿐이었다.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우리 의 독립을 호소하거나 혹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우리의 독립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하는 것도 독립운 동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한국 독립운동에서 국제회 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독립운동 시기에 개최된 대부분의 국제회의에서 한국대표들은 초청받지 못한 ‘불청객’이었다. 1907 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 당시에 한국대표들은 초청 을 받지 못했다. 한국대표가 국제회의에 정식으로 초대된 경우는, 1917·1918년의 소약국동맹회의, 1919년 루체른 국제사회주의자회의, 1922년 극동 민족대회, 1927년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정도밖에 없 었다. 그 외의 중요한 국제회의에서 한국은 늘 ‘불청 객’이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기 때문에, 국제회의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때 문에 중요한 국제회의에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 자 격으로 참석하였다. 국민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문화재전문위 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미주한인사회의 한국독립운동』, 『미주한인 사회의 독립운동가』, 『권승렬 평전』, 『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연구』, 『일왕을 겨 눈 독립투사 이봉창』 등이 있다. 필자 김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