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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24년 9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06회) 앞에서 고바야시[小林]가 이끄는 단천헌병분대 헌병 들과 맞부딪쳤다. 안성교는 상고취지서에서 이 때의 시위 상황을 이 렇게 말했다. “가급적 관사에 접근하지 않고 단천 읍내 시가지 에서 천도교인과 보통사람 모두 600여 명이 맨손 맨 주먹으로 길거리에 똑바로 서서 ‘조선민국 독립만세’ 를 불렀다.” “해산!” “해산!” “해산해!” 고바야시는 시위대를 막아서며 해산을 명했다. 단천 천도교인들은 해산을 명하더라도 저항하기 로 결의한 바 있었다. 최석곤이 외쳤다. “결코 헌병의 말에 따르지 말고, 끝까지 저항하라!” 설운룡 등 여러 명도 소리쳤다. “헌병이 어떠한 방식으로 해산을 명령하여도 어떠 한 행동을 하더라도 결코 그에 따르지 말고 대항하 라!” 군중들은 막대기를 휘두르거나 돌을 던졌다. 헌병 들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빼앗으려 했다는 것은 발포 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한 것일 수 있다. 헌병들이 총기를 난사했다. 『매일신보(每日申報)』 가 이 광경을 보도했다. “오전 11시쯤 되어 시장 방면에서 약 6백명의 군 중이 조선독립만세를 쓴 국기 수십 기를 앞에 세우 고 함성을 질러가며 군청을 습격하였더라. 이 급보를 접하고 헌병분대에서는 만일을 경비하여 읍내 사는 내지인(內地人-일본인을 가리킴) 남녀노소를 피난케 하고 한편 재향군인과 내지 장정 기타를 소집하여 경 계대를 조직하고 진무에 노력하였으나 용이히 해산 치 않음으로 이에 대충돌이 일어나서 삽시간에 수라 장이 되었는데 이렇게 싸운 결과 군중편에 8명의 죽 은 자가 있고 14명이 중경상을 내이고 수모자 143명 을 검거하였는데 검거된 자는 공립소학교에 수용하 고 취조한 후 거괴 12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장래를 엄계하여 방면한 바 그 군중들은 천도교인이 대부분 이라더라.”(『매일신보』, 1919. 3. 20) 당시 9살이었던 천도교인 김용문은 그날 만세시위 에 참여한 부친과 당숙 일을 회상하며 희생자가 10 명이었음을 증언했다. “어느날 새벽인데 당숙께서 아버지를 깨우시니 아 버지도 약속이나 한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 론지 두 분이 나가셨습니다. 그 이튿날 밤에 아버지 께서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집에 오셔서 어머님께 귓 속말을 하시니 어머님은 깜짝 놀라시면서 이내 통곡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인 즉 아버지와 당숙께서 읍 내 나가 만세를 부르다가 당숙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온 집안에 뒤집히는 통곡이 터져 나왔 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저녁때쯤 당숙이 피투성 이가 된 채로 돌아오셔서 하는 말이 같이 만세를 부 르던 동지 이영호(李永浩)가 총에 맞아 당숙의 등에 푹 쓰러지자 총소리는 천지를 뒤엎는 듯하고 기마병 의 말발굽 소리는 앞으로 닥쳐오기에 일단 시체를 업 고 죽은 척 하다가 야음을 타서 빠져나왔다는 것이었 습니다.”(김용문, 「대담: 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단 천군편」, 『신인간』, 1969.4,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