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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등사판을 이용해 '3월 30일 광릉 안 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니 모두 나오라'는 내용의 유인물 200매를 제작해 29일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까지 진벌리를 비롯한 4개 동리에 배포했다. 드디어 30월 30일 주재소 앞 광릉천변에는 주민 1천여 명이 모였다. 만세를 외치는 주민들에게 일본경찰은 폭력으로 맞섰고, 김성암을 비롯해 다수가 체포됐다. 제1차 만세운동이다.
3월 29일 접동리 이재일(李載日)은 '거주하는 동리 주민 일동이 광릉천(光陵川) 강가에 모여서 독립만세 외치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받았다.
그 즉시 동리 주민과 내용을 공유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31일 광릉천 자갈밭에 100여 명이 모여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부른 이재일· 최대봉·박석봉·최대복·유희상 이흥복·최영갑·양삼돌을 비롯해 주민 다수가 체포된 '제2차 만세운동'이었다.
금곡리에서도 청년 13명을 주축으로 400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됐다. 당시 3·1운동 전국 확산을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일본은 엄중한 감시망을 형성했지만, 선조들의 뜨거운 고국충정 의지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 불합리로 무장한 일제 '만행'
봉선사 서기실에서 비밀 회합을 얻어 독립운동 당위성을 제작한 스님들은 조국의 독립을 열망했다는 대가로 부당한 옥고를 치렀다.
운암스님은 1919년 9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지월스님도 같은 해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