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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24년 5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직에서 해임이 되고 귀국했다. 1904년 초부터 이한 응이 대리공사(a chargé d´affaires)로서 업무를 수 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한응 대리공사는 영국정부 에 자신의 한반도 중립화안을 담은 메모를 수교하 는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영국 외교부와 접촉을 시 도했다. 1904년 1월 15일 영국 외무부의 캠벨(F. A. Campbell)에게 본국정부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하는 등의 대영 외교를 펼쳤다. 그러 나 영국정부는 이한응의 요구와 한국에 대한 새로운 보장을 해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대리공사로서 이 한응은 영국정부로부터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한 노력을 했지만, 영국의 지원을 얻을 수는 없었 다. 이한응은 당시의 국제상황으로 보아 러일전쟁에 서 일본이 승리하면 전후에 한국의 독립이 유지되기 가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영국 을 상대로 독립을 보장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그는 1905년 2월 8일 영국 외교부를 방문하 여 극동국의 랭리(Langley)에게 한국 독립보장 문제 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3월 3일에는 영국 외무대신에게 대한제국정부를 위해 거중조종(G ood Office)을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일본 과 러시아 사이에 최종적으로 조정된 평화협정 조건 의 하나의 형태로 한국 영토 보존과 독립을 보장해 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한응, 주영대한제국공사관에서 순국 이한응이 영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치고 있을 무렵인 1905년 4월 12일 하이드 파크(Hyde Park) 에서 두 명의 괴한이 그의 목숨을 노렸다. 이한응은 영국 외무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 다. 이한응은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매우 위험 한 상황에서 병이 났다. 1905년 부활절 무렵 영국과 일본의 제2차 영일동맹에 대한 협의가 진행되고 있 었다. 이한응은 영국 외무부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지만, 영국정부는 그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 고 있었다. 한국인들을 자식처럼 돌봐주던 본 윌리암스 부부 는 이한응을 위해 브링턴(Bringhton)의 바닷가 마을 로 그를 데리고 갔고, 리스 힐에서 휴양을 시켜 주었 이한응 열사 친필 유서 이한응 열사(1874.10.30~1905. 5.12) 현재의 주영국대한제국공사관 건 물 내부(이한응 순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