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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의 독립전쟁과 국내진공작전┃103 ▶ 제 2차 영릉가 전투 1932년 6월 8일 일본군과 만주군 연합부대 병 력이 다시 영릉가를 공격하여 오자, 한중연합군 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격전 끝에 이를 격퇴 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 어 있어 부득이 하게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조선혁명군과 중국의용군 진지가 있는 환인 · 유하 · 휘남현을 공격하여 왔고, 거의 동 시에 중국항일군의 총본부 주둔지인 통화현으로 물밀듯이 진격하여 왔다. 중국항일의용군은 무기의 부족, 전투력의 저하 등으로 일본군을 더 이상 대적할 수가 없어 전투 를 제대로 벌이지 못하고, 이틀만에 통화를 버리고 몽강현의 산림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조선혁명군은 청원현 시내 일본군 진지에 기습 돌격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대량 사상하였으나 일본군 전투기의 폭격, 대포의 무차별 포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청원전투에서 이해천, 김일룡, 박석원 등 분대장과 30여명의 대원이 전사하였으며 수십여 명의 후방 대 원이 사살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도 패전을 당함으로써 조선 혁 명군은 부득이 청원 동쪽 남산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 제 3차 영릉가 전투 일본군은 1932년 7월 7일 또 다시 영릉가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공 격하여 왔다. 그러나 혁명군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전술과 제3로군 조화 선 부대의 지원으로 일군 40여명을 사살하고 중포 1문, 경기관총 3점, 소총 80여 점을 노획하였다. 한·중연합군은 그 기세를 몰아 7월 15일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 연대를 공격 하였다. 이틀간 걸친 격전으로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그 후 일본군 1개 대대가 통화현에 주둔하고 있는 제4로군 최윤구 부대를 습격하자, 박대호 부대의 지원병력을 투입하여 적을 격퇴시켰는데 이 전투에 서 적은 8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조선혁명군의 전투력과 강인한 정신으로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 풍부 한 보급지원을 받는 일본군의 반격은 집요하였다. 조선혁명군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관동군 사령부의 명 령에 따라 서간도 일대에서 전투기까지 투입하여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한·중연합군의 병력은 일당백의 사기와 전투 경력을 지녔지만 화력의 열세나 항공기를 지니지 못한 약 점으로 일본군을 완전히 제압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사방에서 포위망을 압축하며 미친개처럼 집요한 공 격을 퍼붓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차츰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더구나 전투장비와 보급이 절대적으로 부 족한 조선혁명군의 전투력은 약화되었고, 지원병도 줄어들어가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혁명군의 사기 는 저하되어갔다. 영릉가 전투 유적지(영릉가진 소자촌) 영릉가 전투 유적지(신빈현 영릉가(좌) 왕청문진(우)) 조선혁명군 전투 유적지(요녕성 환인현 조양문 일대) 조선혁명군 항일전쟁의 승전과 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