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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우리민족의 선각자 서재필이 독립운동을 펼친 곳, 필라델피아 105 취하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기사 내용도 매우 다양했다. 그리고 특집기사에는 독립운 동 소식, 한국친우회의 활동상에 대해 자세히 게재 하고 있었다. 『한국평론』은 미국뿐만 아니라, 해외에 배포되어 전 세계인이 읽히는 잡지였다. 프랑스 파 리위원부에도 『한국평론』이 배포되어, 파리에서 활 동하던 각국의 민족운동가들도 보았다. 일례로 파리 에 있던 베트남의 민족지도자 호치민도 파리위원부 에서 『한국평론』을 빌려다가 읽었다. 호치민은 프랑 스 경찰관 쟌(Jean)에게 『한국평론』을 “한국의 정치 와 종교의 자유를 위한 월간잡지”라고 소개하였다 (프랑스 Archives nationales d'outre-mer 소장자료). 서재필과 안창호의 만남 미국에서 활동했던 가장 대표적 독립운동 지도자 로는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를 들 수 있다. 서재필과 이승만은 독립협회 시절부터 사제지간으로 지냈던 사이였다. 1919년 이승만이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를 설립하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921년 이승만이 상하이로 갔을 당시, 서재필이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워싱턴회의가 개 최될 때 한국대표단을 구성했는데, 이승만이 대표 로, 서재필이 부대표가 되어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처럼 이승만과 서재필은 오랜동안 같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누구 보다도 두 사람 사이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재필과 안창호는 같이 미국에 오랫동안 살았지만 서로 만나지 못했다. 안창호가 1925년 미국 동부를 순행할 당시 시카고에서 서재 필과 처음 만났다(「My Impression of Ahn Chang- Ho」, 『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8년 4-5 월 합본호).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여 밤새도록 우 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재필은 안창호를 처음 만났지만, 그의 이상과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때 안창호는 서재필 에게 자신의 과거의 일을 고백하였다. 안창호는 평 양에서 서울로 올라와 독립협회에서 서재필의 강연 을 듣은 후 우리나라를 근대국가로 만드는 일에 평 생을 바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서재 필은 안창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캘리 포니아나 원동지방에서 사업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 고 제의했다. 안창호의 능력이면 사업을 훌륭하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창호는 서재필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아니오(No)’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서재필은 왜 사업을 하지 않 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창호는 “40여 년 전에 한 국에 있을 당시 독립협회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 후, 우리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 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창호는 독립협회에서 서재필에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의 강의를 1 년 여 동안 경청하였던 것이다. 서재필은 1896년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독립협 회를 설립하는 등 조선을 근대국가로 변화시키겠다 는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강의를 했다. 서재필의 강연이 안창호로 하여금 민 족을 부흥시키는 일에 투신하게 했던 것이다. 서재 필은 안창호를 만나보고, 그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정치적 인물이 꼭 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래서 서 재필은 “안창호 선생 같은 이는 아브라함 링컨”과 같 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아브라함 링컨을 만들 어 봅시다”라고 호소했다(『신한민보』 1925년 9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