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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세계평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다, 브뤼셀 105 이었다. 한국대표로는 프랑스 파리한인친목회 회 장을 맡고 있던 김법린(金法麟)과 독일 유학생 이 극로·황우일·이의경(이미륵) 4명이었다. 그 외 마 침 유럽을 여행 중인 허헌(許憲)이 신문기자 대표 로 합류하여 표면상 5명의 한국대표단을 구성하 였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정석해의 자서전 에 의하면, “벨기에 브뤼셀에서 약소민족회의가 모스크바 공산당의 지령에 의해 열렸어요. 사실 이 회의가 있는 것은 백림(白林)에서 이극로가 내 게(정석해-필자) 편지를 해서 그가 가는 줄 알았 는데, 그러니까 우리도 빠리에서 대표를 보내자고 했죠. 그리고 우리의 빠리 거류민단의 대표로 김 법린을 보냈어요. 인도에서 네루가 대표로 온 이 때 우리는 그래도 대표를 보낸다고 그 자격증을 발행하고는 서명을 내가 해서 보냈더니, 대회측에 서 보니까 이극로 박사는 개인으로 왔고 이쪽에서 보낸 김법린은 무슨 자격을 가지고 온 것 같거든 요. 그래 김법린이 오히려 한인 대표격이 되었죠” 라고 하였다. 김법린은 본회 첫날인 2월 10일에 일본 규탄 연 설을 하였고, 이극로는 원동위원회 정치산업부 위원 으로 활동하였다. 김법린이 연설하기 전에 일본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카타야마 센(片山潛)의 기조연설 이 있었다. 김법린은 「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 」 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한국침략 역사와 폭압 적 식민지 지배의 실상을 폭로하고, 일본의 범죄를 처벌해야만 한다고 연설하였다. 1927년 2월 14일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최종 회의 에서 각 대표단 결의안이 낭독되었는데, 「 한국대표 단 결의안(RESOLUTION der KOREANISCHEN DELEGATION) 」 도 공식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 대 회에서는 한국·중국·인도·시리아 4개국의 아세아민 족회가 설치되었고, 한국위원으로 김법린이 선출되 었다. 세계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된 후 그해 12월 9 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브뤼셀에서 열린 반제국주 의연맹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김법린은 최린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 실정을 보고하였다.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은 당시 각 김구가 서영해를 임시정부 주법특파원으로 임명하는 편지(1936년 4월 1일) 만국평화대회 개최지(현재 브뤼셀 박람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