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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6회) • 함경남도 단천의 만세시위 105 교사 서봉화(徐鳳和)가 최봉천을 통해 풍산군 이인면 가재리 천도 교 분교실과 갑산 천도교구실에 독립운동 방침을 전달하여 풍산, 갑산 등 주변 일대에서 3월 15일 을 전후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 이 일어나게 되었다 했다. 3월 10일 파도면 단천 읍내 시위 1919년 3월 8일 파도면 천도교 단천교구장 염원 형(廉元亨)은 이원 천도교구장 김병선(金秉璿)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 안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들어 있 었다. “이번에 교주 손병희가 조선 독립을 위하여 경성 (京城)에서 독립운동을 개시했습니다. 독립선언서도 배포되었으니 단천에서도 운동을 개시해야 할 것입 니다.” 편지와 함께 독립선언서가 있었다. 교구장 염원형은 곧바로 천도교인 안성교(安聖敎, 37세, 대서업)·최덕복(崔德福, 38세, 약종상) 등을 교 구당으로 불렀다. 이들은 이틀 뒤인 3월 10일이 천도 교 교조 최제우의 순도기념일(殉道記念日)을 거사일 로 정했다. 이틀밖에 시간이 없었다. 교구장 염원형 은 교인 최석곤(崔錫昆, 35세, 농업)과 설운룡(35세, 천도교회 서기)에게 교구당의 등사판으로 “민족자결 의 원칙에 의거하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다”는 ‘조 선민족독립단’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약 200매 가량 인쇄하게 했다. 한편, 염원형 교구장은 안성교에게 더 확실한 정보 를 확인하게 했다. 안성교는 이튿날인 3월 9일 이원 천도교구장 김병선을 만나 조선 독립 선언과 독립 만 세를 외칠 것을 확인했다. 그는 다시 경성으로 가고 자 하다 헌병들의 단속이 철저하여 상경을 포기했다. 그는 이원에서 숙박하고 3월 10일 오전 10시경 단천 천도교구실로 돌아왔다. 예정한 3월 10일이 되자 단천 천도교구실에서는 300여명의 교인들이 대기도회에 참석했다. 예식을 마치고 교구장 염원형과 안성교 등은 교인들에게 독 립운동 취지를 연설했다. 그들은 말했다. “관헌이 해산을 명하더라도 독립기를 사수하고 반 항해야 하오!” “암, 그래야지요!” 교인들은 전원 찬성하고 함께 하기로 결의했다. 오전 11시경 교구장 이하 교인들이 태극기를 앞세 우고 단천 교구당을 출발하여 파도면 하서리 단천시 장으로 나아갔다. 시장에서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배 포하고 독립 연설을 한 후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선창 했다. 1천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니 산천이 진동하는 듯했다. 시위대와 장꾼들이 대열을 지어 독립만세를 부르며 단천 읍내를 행진하 기 시작했다. 만세 군중들은 읍내 주남리 삼거리 구남문(舊南門) 1911~12년 경의 단천 읍내 전경(한국민족 문화대백과 사진). 단천군 파도면 독립만세 시위운동 주도자 염 원형 등 고등법원 판결문(국가가록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