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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북미 최초의 한인타운, 리버사이드에 ‘도산의 공화국’을 세우다 105 를 영어 발음이 들리는대로, ‘으리버싸이드’라고 적 었다. 리버사이드는 187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미국 에서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오렌지 재배지역으로 각광 받았으며, 유전과 채석장도 번창하여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한 관계로 하와이로 이민을 온 한인들 이 대거 이주하여 왔다. 도산 안창호가 리버사이드에 조직한 ‘공립협회’ 리버사이드에 오렌지 산업이 발달하면서 19세기 후반 중국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3,000여 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리버사이드에 들어오고, 리버사이 드 시내에는 두 곳에 차이나타운이 건설되었다. 한 인들이 리버사이드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이들 중국 인들을 상대로 고려인삼을 팔기 위한 상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장지대가 점점 번성하고 노동력이 더욱 필요하게 되면서, 한인 노동자들도 리버사이드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서 왔다. 도산(島山) 안창호 (1878~1938)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느 정도 한인 들의 생활개선운동이 성공을 거두자, 한인 노동자 들 이 많이 있는 리버사이드로 갔다. 도산은 부인을 샌 프란시스코에 남겨두고 1904년 3월 리버사이드로 혼자서 왔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1903년 9월 3일 미주 최초의 한인단체인 ‘친목회’를 조직하였다. 하 와이 한인들이 북미로 이주하면서 오렌지와 포도 등 농업이 발달된 남가주의 농장지대로 몰려왔다. 어릴 때 하와이 이민을 와서 북미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차 의석은, 그의 책 『금산(Golden Mountain)』에서 하 와이에 “매주, 매월 새로운 동포들이 왔다”라고 했다. 리버사이드에서 도산은 알타 비스타(Alta Vista) 오렌지 농장주 럼지(Rumsey)의 권유로 그가 빌 려 준 1,500달러로 한인들을 위한 노동주선소를 차렸다. 노동주선소는 파차파 애비뉴(Pachappa Avenue) 1532번지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리버사 이드에서 동포들을 위한 사업을 할 당시 안창호는 늘 입버릇처럼, “미국의 과수원에서 귤 한 개를 정성 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오렌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한인마을(Korean Settlement, 1908년) (출처 USC Digital Archives) 리버사이드 파차파 한인마을이 있던 자리(2002년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