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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6회) • 파주의 독립만세시위 105 서 내려와 오후 2시경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며 면장의 참여를 요구했다. 일부 시위대는 면사 무소 판자문과 기와 일부를 부수었다. 시위대는 교하 주재소를 향했다. 도중에 출동한 주재소 헌병들이 발 포하여 사상자가 생겼다. 서울 인근 시위에서 일제의 총검에 부상을 입은 사 람들이 세브란스 병원에 후송되어 왔다. 장로교 선교 사의 보고서에는 이때 부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후송되어 온 파주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정영희(Chung Yung Heui): 서른네 살. 파주 (Paju) 출신. 3월 28일 오후 1시, ‘만세’를 외치는 4백 여 명의 군중들에게 일본 헌병이 총을 발사했습니다. 군중들은 돌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총격으로 여덟 명이 사망했고 그는 목에 총알이 관통 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유영군(Yu Yung Kun): 마흔두 살. 서울에서 65리 (약 26킬로미터) 떨어진 파주(Paju)의 신산리 장로교 회(Sin San Lee Presbyterian Church) 총무. 아무런 무기도 없는 빈손으로 약 1천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습니다. 달리는 시위 군중을 따라 오며 일본 헌병들이 총을 발사하여 세 명이 숨지고 세 명 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는 목 측면 부위에 관통상 을 입었습니다.“ 3월 30일 광탄면 봉일천 시장에서는 다시 일본 헌 병대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수많은 주민들 이 이에 합세하여 시위규모는 3,0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고 구금된 인사 한 명을 일시 탈환하기도 했다. 헌병이 출동하여 발포하자 해 산했다가 밤이 되자 다시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계속했다. 이처럼 파주의 3월은 피로 물들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금촌역 앞 난장(1937년)경의선 금촌역 부근을 지나는 기차(195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