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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그 현장을 가다 ③ 105 내 진공을 감행하고 힘을 키워나 갔다. 최재형은 소년 시절 노비의 신 분으로 모국땅을 떠나 러시아 연 해주로 이주했다. 그는 연추 포구 (현 포시에트) 항구 입구에서 허기 가 져서 쓰러져 있다가 러시아 상 선 선장 부인에게 발견되었다. 선 장 부부의 총애를 받으며 6년간 세계를 돌고 경험을 넓혔다. 러일 전쟁 통역으로 일하고, 군납업으 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재산을 모두 항일투쟁에 바쳤다. 수많은 의병이 먹고 입고 훈련하는 힘은 그에게서 나왔다. 블라디보스토 크에서 권업회의 초대회장을 맡 았고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대 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부장이 되 기도 했으나, 1919년 4월 일본군 에 체포되어 우수리스크에서 총 살당해 생애를 마쳤다. 안중근은 이범윤과 최재형이 만든 연추의병대를 이끌고 국 내 진공을 단행한 지휘관이었다. 1908년 여름, 두만강을 건너 함 북 경흥군 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전과를 올리고 귀환했다. 한 달 뒤 다시 국내진공에 나서 경 흥과 신아산에서 일본군과 격전 을 벌였다. 안중근은 홍범도 의병 대와의 연합 계획이 빗나가고, 적 포로를 국제공법에 따라 석방한 일 때문에 참패를 당해 거의 혈혈 단신으로 돌아왔다. 절치부심, 재 기를 다짐하면서 1909년 3월 김 기룡 · 강두찬 · 유치현 · 박봉석 · 강기 순 · 김백춘 등 동지들과 함께 단지 혈명(斷指血盟)을 맺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이토 히로부미가 온다는 정보를 듣고 하얼빈으로 가서 저 격했다. 그런저런 자료들을 손에 들고 크라스킨 전망대에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최재형의 저택 과 연추 창의대 지휘부, 그리고 학 교와 교회터, 안중근 단지혈맹의 장소였던 증거와 함께 최근 발굴 된 하연추 마을을 돌아보면 얼마 나 좋을까. 그러나 출입금지라 불 가능하다. 나는 그곳이 하연추라고 확정 되기 전인 2000년, 송지나 교수의 안내로 가 보았다. 우크라이나인 들이 이주 정착했다는 쭈가노프 카 마을의 강 건너 앞쪽 울창한 숲 속에 전주들이 줄줄이 서 있는 곳 이 바로 하연추였다. 상수리나무 와 졸참나무 들이 관목들과 뒤엉 켜 있는 밀밀한 숲속에서 우물 자 리와 대저택이었음을 알려주는 담 장과 벽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지동맹 현장을 가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에 만든 기념적 장소 가 있다. 단지동맹 기념비가 그것 이다. 처음에 쭈가노프카 마을 입 구에 세웠는데 관리하기가 어렵 고 출입을 금하게 되자 남양 알로 2000년 우물 자리를 답사하는 필자(앞)와 송지나 교수, 대한매일 박재범 부장 『저기에 용감한 조선군인들이 있었소』에서 옮김. 답사 때 휴대하며 참고한 손그림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