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page

3월의 전설(90회) • 함경북도 성진의 만세시위(1) 105 배, 정의택, 농민 이경화, 잡화상 김수용과 음 식점 주인, 시계수선업자, 묘목상 등 예수교 신자들과 천도교 교인들이 함께했다. 이들의 권유로 참여자들은 더욱 늘었다. 시위대는 욱 정을 출발하여 일본인 집단 거주지인 본정(本 町)으로 행진했다. 본정 식산은행지점 부근에 서 성진경찰서 경찰들이 도열하여 저지했다. 일경들이 해산을 명령하고, 태극기를 빼앗 으려 했다. 군중들이 이에 완강히 대항하며 일경을 공격해 부상을 입혔다. 또한 기와 등 을 던져 순사 3명과 경부 1명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본정의 일경 저지선을 뚫고 시위대는 성진 군청으로 나아가 압박했다. 군수가 나와 해산을 종 용하고 일경들은 무력으로 위협했으나, 군중들은 불 응했다. 일경들이 군중들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했 다. 오후 4시 30분경 군중들은 군청에서 물러나 해 산했다. 이규용은 오후 9시경 부트선교사 고용인인 마(馬) 여인 집에서 서재영, 유명식 등과 독립신문을 등사했 다. 이후 일경의 가택 수색으로 허용필이 경성에서 가져 온 격문 60매, 선언서, 등사판은 압수됐다. 밤 9시경 다시 수백명의 군중들이 읍내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군수, 보신학교장 로스 등이 설 득하고 제지하여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다. 일제는 재향군인, 소방조원 및 공장의 직공들까지 동원해 경계를 강화했다. 함경북도장관은 보병 제37여 단 나남부대에 병력 동원을 요청했다. 군부대는 그날 밤 기병 장교와 하사 등 14명을 육로로, 보병 장교 2명 과 병졸 20명은 3월 12일 아침에 해로로 성진으로 출 발시켰다. 성진에서 체포된 주도 인사 15명은 보신학 교 교사 2명, 예수교 신자 13명이었다. 이들은 재 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그리어슨은 이렇게 기록했다. “즉각, 소방도끼로 무 장한 일본인 소방수들과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일인 정착지에서 출발하여 고요한 한국인 거주지로 쳐들어 와 때리고 차고, 총기를 발사했다. 그렇잖아도 진료가 몰리는 월요일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리어슨은 곧 일본 경찰에 소환되어 독립선언서 3 만매 인쇄 등과 같이 성진 만세시위를 지원하고 참여 한 혐의로 조사받았다. 보신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성 진 만세시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계속)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성진 보신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관한 함경북도 장관(도지사)의 보고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