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page

104 2025년 2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제1차 대전 당시 디트로 이트에서 전쟁물자가 대량으로 생산되었을 때 노동 자들이 몰리고 일자리가 필요하게 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생산의 중심 지로 ‘캐딜락 공업학교’에서 학비와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였다. 이 학교에서 2년을 공부하면, 디트로이 트의 자동차 회사에 취업 할 수 있었다. 디트로이트의 한인단체 1909년 2월 1일 북미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 인합성협회가 통합하여 미주 최대의 한인단체인 ‘국 민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1910년 2월 10일 대동 보국회까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가 되었다. 미 주 각지에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방회가 창설되어 한 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민족 독립운동의 중심 단체 가 되었다. 디트로이트에서도 1919년 3·1독립선언 의 소식을 들은 직후인 1919년 4월 25일 임시 한인 공동회를 개최하고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설립을 청 원하였다. 북미지방총회에서는 5월 2일 디트로이트 지방회 설립을 인준하였다. 당시 디트로이트의 한 인 인구는 40~50명 정도였다. 북미지방총회의 인준을 받은 디트로이트 지방회 에서는 1919년 5월 2일 임시조직회를 개최하여, 회 장에 박처목, 부회장에 이완수, 재무에 정명근, 서기 에 이병섭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6월 16일 정식으로 디트로이트 지방회를 개회하고, 회장 김배혁, 부회 장 신현철, 총무 박봉래, 서기 이병섭, 재무 오대도, 법무 이완수, 학무 정양필, 대의원 박처목을 선임하 였다. 3·1운동의 열기가 식으면서, 디트로이트 지방 회는 활동이 부진하여 해체되었다. 그리고 안재창·조오흥·김진목 3명에 의해 동지회 디트로이트지회 설립이 추진되어, 1929년 3월 1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동지회 지회 회장에는 정양 필, 총무에 조오흥, 재무에 전덕기, 서기에 김진목 등 이 선출되었다. 그렇지만 디트로이트에서는 국민회 혹은 동지회가 나뉘어 싸우는 일은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41년 12월 25일 황창하에 의해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회가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지방회 1942년도 성적보고서(1942년  12월) 박봉래의 아시아동정회 성명서(1919년, 이상 대한인국민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