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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2025년 1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래서 그는 ‘쌀의 대왕(rice king)’이라는 별명을 얻었 고, 그가 일군 부의 대부분은 비행학교의 설립과 운 영에 제공되었다. 한인비행가양성소의 훈련 노백린은 김종림과 협의하여 비행학교 설립은 일 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김종림은 비행학교 설립을 위 해 2만 달러를 내고 토지 40에이커를 비행장으로 제 공했다. 노백린은 비행군단 설립을 위해 새크라멘토 에서 열성적으로 지휘를 하고 있었다. 『윌로우스 데 일리 저널』 1920년 3월 1일자에 실린 기사에 의하 면, 노백린은 “(비행)학교에 필요한 교원과 비행기가 갖추어지면 곧 설립될 것이다. 그것의 목적은 일본 으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얻기를 원하는 한인 청년들 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는 데에 있다”라고 분명히 밝 혔다. 한인비행가양성소는 윌로우스 퀸트 지구(Quint District)에 설립되었던 퀸트 학교의 교실을 임대하 여 사용했다. 퀸트 학교가 폐교된 후 방치된 교사(校 舍)를 임대받고, 비행학교의 교육장으로 썼다. 비 행 학교의 생도들은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둔전 병식(屯田兵式)으로 군사교육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군사훈련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3월부터 시작된 비행학교는 6월 22일 첫 번째 비행기가 도착했고, 6월 24일 두 번째 비행기 가 도착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들어온 비행기 는 홀스코트 모터(Hall-Scott Motor)를 장착한 최 신, 최고 기종의 ‘Standard J-1’이었다. 훈련용 비 행기 꼬리에 태극마크를 그려 넣었고, 비행기 옆에 는 ‘K.A.C’라고 쓰여져 있다. ‘K.A.C’는 ‘Korean Aviation Corps’의 영문 약자이다. 즉, ‘한인비행사 양성소’를 뜻한다. 1920년 7월 25일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한 이 후 비행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비행가양성사 장정’ 을 제정하였다. 비행기 2대로 교육을 하다가 학생 수가 늘어나 1대를 더 주문했고, 무선전신 기계도 주문했다. 또 비행학교의 교관 브라이언트(Henry 한인비행가양성소의 비행기 격납고(USC 디지털 아카이브) 한인비행가양성소에 훈련용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기사(『Willows  Daily Journal』 1920년 6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