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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2024년 7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일제의 ‘만주사변’ 도 발과 리튼보고서 일제는 1931년 9월 18일 중국 랴오닝성 (遼寧省) 선양(沈陽, 奉 天) 북쪽에 있는 류탸 오후(柳條湖) 부근 만 철(滿鐵)의 선로(線路) 를 폭파하였다는 구 실로 ‘만주사변(중국 에서는 ‘9 · 18사변’이 라고 함)’을 일으켰다.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제는 이듬해인 1932년 3월 ‘만 주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중국 관내까지 침략을 확 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북아시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던 국제연맹은 영 국의 리튼경(Lord Victor Bulwer-Lytton)을 단장으 로 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른 바 ‘만주사변’의 진상을 파악하기로 하였다. 리튼조사단은 1932년 2월 말부터 일본과 중국 을 방문하여 정부 당국자들을 만나고 만주 현지에 서 조사를 끝낸 뒤, 그해 10월 약칭 『리튼보고서(The Lytton Report)』를 발표하였다. 사건 현장을 조사한 『리튼보고서』에서는 류탸오후 사건은 일본군의 군사 행동으로 정당방위라고 볼 수 없고, ‘만주국’은 국제 연맹에서 승인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국 제연맹에서 리튼조사단의 보고서가 채택되자, 일본 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의 탈퇴를 선언함 으로써 스스로 외교적 고립의 길을 자초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특명전권수석대표 이승만 『리턴보고서』는 국제연맹이 ‘만주사변’과 괴뢰 만 주정권에 대해 결론을 내는 중요한 문헌이며, 국제적 차원에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것이었기 때 문에 우리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 었다. 1932년 말부터 국제연맹에서는 『리턴보고서』 의 해석과 채택을 둘러싸고 중·일간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워싱턴에 있던 이승만은 제 네바 국제연맹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대 한민국임시정부 외무장 조소앙에게 위임장을 보내 달라고 전보를 보냈고, 조소앙은 중국어로 작성한 위 임장을 파리의 서영해에게 보냈다. 대한민국임시정 부에서 이승만에게 보낸 「 특명전권수석대표 신임장 」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전(前) 대통령 이승만 박사 를 제네바 국제연맹에 파견하는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선정하였습니다. 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각 우방국 대 표들과 본국의 자주독립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의견을 교환하고 이웃 나라를 병탄한 일본의 위약(違 約) 행위를 만천하에 폭로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십시 제네바의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1919년 4월 김규식이 스위스 취 리히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이관 용에게 보낸 영문 편지(독립기념 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