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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2024년 3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00회) 않았다. 4월 3일 부산진보통학교 시위와 교사 홍재문 부산진보통학교는 원래 사립이었다. 1910년에 국 권을 빼앗은 뒤 일제는 한말의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사립학교들과 교육구국운동을 탄압하고, 식민지 교 육을 강화하기 위해 1911년 4월에 부산진사립보통학 교를 공립학교로 만들고, 사립좌천학교를 흡수하여 그해 11월에 부산진공립보통학교로 재출발하였다. 1919년 4월 3일 오후 2시 30분 부산진 좌천동 일 대에서 부산진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기독교 부인 등 군중 1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주동자 10 명을 검거하고 해산시켰다. 범일동에 사는 부산진보 통학교 4학년생 배원수(裵元守, 19세)도 이때 참여하 여 징역 4월에 2년간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4학년생 배원수 등 부산진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 참여 배후에는 교사 홍재문이 있었다. 교사 홍 재문(洪在文)은 1914년 12월 19일 조선총독부 경성 공업전습소 본과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하여 제7회로 졸업하고, 1916년 공립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로 부산진공립보통학교에 부임했다. 그는 1898년 3 월 20일 경남 밀양군 말양면 삼문리에서 출생한 21살의 청년 교사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서울 에서 비밀리에 발간되었던 「조선독립신문」을 부산에 서도 제작 배포할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4월 3일 부 산진보통학교 전교생을 동원하여 만세시위에 참여 시켰다. 4월 3일 만세시위 후 그는 4월 5일 휴직계를 내고 잠적하여 체포를 면했다. 그가 학교로 돌아오지 않자 1919년 7월 31일부로 면직되었다. 피신한 홍재문 교사는 같은 밀양 출신의 권잠술 (權岑術, 24세), 김덕곤(金德坤)과 함께 상해(上海) 대 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독립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 다. 홍재문은 권잠술이 알고 있는 밀양군 부북면 전 사포리 부호 안홍원(安弘遠)에 대한 정보룰 듣고, 동 지 김덕곤(金德坤)과 함께 안홍원의 양잠실로 찾아가 서 “군자금 모집원이 면회를 원한다”고 하며 안홍원 을 만났다. 이들은 완구용 권총을 겨누고, 모 독립운 동가가 우송한 사형선고문을 보여주며 선포했다. “불응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군자금 5만 원을 제공하면 사면하겠다!” 홍재문의 임시정부 자금 모금사건으로 체포보도 기사(『동아일보』 1921.7.1) 홍재문의 출옥 사실 보도기사(『동아일보』1927.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