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page
104 2023년 8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투쟁하고 남한이든 북한이든 귀 국에서 군사지도자가 되었을 청 년들이었다. 그들은 광동 코뮌이 공산주의 혁명이라서 대한민국에 서는 훈장 추서조차 없다. 2000년 처음 갔을 때 ‘나는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하고 약속했는데 18 년 만에 가니 그대로 있었다. 장지락이 살아남은 해풍과 육풍, 그리고 그의 혈육 광저우 봉기에서 살아남은 장 지락과 오성륜은 광저우 동쪽 해 풍현과 육풍현 소비에트로 갔다. 동강(東江) 지역에 이르러 장지락 은 공산당학교 일을 맡았다. 교무 위원으로서 교학계획과 강의 시 간표를 작성했으며, 레닌주의의 개요, 소비에트의 건설, 세계혁명, 중국공산당 역사, 군사상식, 선전 기술 등을 가르쳤다. 동강당학교 구지(舊址)기념관과 해풍현 혁명 사 기념관 사진은 김기봉 순국선 열유족회 부회장(광복회 서울지 부장)님의 2020년 답사 사진을 싣는다. 그때 장지락이 사랑한 어린 여 자병사가 있었고 임신 중이었다. 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장지 락은 산동성(山東省) 출신의 건장 하고 믿음직한 중국인 부하에게 그녀를 맡기며 어떻게든 살아남 으라고 했다. 장지락은 그곳까지 추격해 온 국민당 군대에 쫓겨 구 사일생으로 살아 홍콩을 거쳐 상 해로 갔다. 그 후 중국공산당 고 위간부가 되어 일본과 투쟁한 그 는 중국공산당 근거지 옌안(延安) 의 항일군정대학 교수로 있다가 1938년 간첩누명을 쓰고 34세로 처형되어 생을 마감했다. 30년 뒤, 산동성에서 온 청년이 베이징 당안관(檔 案館, 기록보존 소)에 가서 방명록에 ‘장고려(張高 麗)’라는 이름을 적고 장지락의 생 사를 확인하려 했다. 요원들이 “그 는 간첩으로 처형되었다.”라고 하 자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고 사 ➊ 황포군관학교 내무반(재현) ➋ 광동코뮌에서 희생된 충북 출신 안태 생도묘비를 18년 만에 다시 어루만지는 필자 (2018년 겨울) ➊ 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