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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2023년 7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93회) 은 사상자가 생기면서 군중은 흩어진 것 같다. 열흘 뒤인 4월 6일 신천면 읍내에서 다시 만세시 위가 일어났다. 신천면 무정리 박문용(朴文鎔)과 고종 환(高宗煥), 사직리의 양제선(梁濟善)과 양재원(梁在 元)은 이날 시위를 위해 4월 3일 태극기를 제작했다. 4월 6일 신천 읍내에서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울 려퍼졌다. 무정리와 사직리 주민들이 뭉쳐 만세시위 를 벌였다. 이날 시위 참여자는 30명에서 1400명까 지 보고 자료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그 다음날인 4월 7일 밤에도 시위가 이어졌다. “신천군 신천면 사직리 읍내에서는 4월 7일 오후 8시부터 기독교인 등 약 400명이 신천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고 헌병을 구타했다.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아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의 보고 내용이다. 신응희 황해도장관은 4 월 8일, 전날의 시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4월 7일 밤 신천군 읍내외 신천군 각소에서 소요 하므로 발포하여 해산시킴. 헌병 부상자 3명, 폭민 사망자 1명, 부상 불명. 아직 험악한 상태이므로 파 병을 구하여 경계에 힘쓰고 있음.“ ”신천군 읍내에 약 400명, 신천군 용문면에 약 150명이 폭동을 일으켜 헌병이 발포하여 진정시켰 다. 폭민 중 다소 부상자가 있다.“ “7일 신천군 신천, 석당, 유천, 사창(司倉)과 신환 포(新換浦)와 내종(內宗), 안악 등에 3백 내지 4백명 이 운동하였다. 그 대부분은 폭행이며, 헌병이 발포 하여 해산시켰다. 폭민 1명이 죽고, 2명은 중상을 입 었다. 헌병 3명도 부상을 입었다. 사리원에서 내종 방면으로 응원대를 파견하였다.” 3월 29일, 4월 4일 노월면 3월 29일 노월면 오국리(五局里)에서 20명이, 4월 3일 노월면 오국리에서 다시 기독교인 등 3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신천군 두라면 청계리 초대 · 마지막 주임 빌렘신부(1898~1912, 위쪽 가운데 검은옷)와 신자들 신천 만세시위 상황보고(1919.3.27) 일본 육군성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