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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 ‘한인비행가양성소’가 창립된, 북가주 윌로우스 103 윌로우스 ‘한인비행가양성소’의 창립 비행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해야만 한다는 논 의는 3 · 1운동 소식이 미주에 전해진 이후부터 시작 되었다. 미주에서 한인 비행가를 양성했던 기관을 일반적으로 ‘윌로우스 비행학교’라고 불렀다. 그리 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주도했었 기 때문에 ‘노백린 군단’ 혹은 ‘비행군단·군단학교’라 고도 했으며, ‘한인비행기학교·한인비행학교’ 등 다 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한인비행가양성소’라는 학교가 1920년 7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정식으로 설립되 어 운영되었다. 비행학교는 1920년 1월 노백린이 샌프란시스코에 오면서 본격화되었으며, 2월 20일 경 노백린과 윌로우스의 한인 재력가들과 비행학교 설립을 결의하였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은 노백린 의 지휘 하에 윌로우스 재력가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1920년 2월 말 퀸트 학교(Quint School)의 건물을 비행학교로 임대하고, 김종림이 제공한 40에이커의 토지가 비행장으로 사용되기로 했다. 그래서 3월 3 일부터 일반교양과 이론을 중심으로 일반학과를 교 습하였고, 4월 7일경부터 한인청년들을 상대로 본격 적인 군사훈련과 영어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해 6 월 22일 첫 번째 비행기가 비행학교에 도착했고, 6 월 24일 두 번째 비행기가 도착했다. 훈련용 비행기 두 대와 교관 등을 갖춘 이후 1920 년 7월 5일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정식으로 개교하 게 되었고, 비행가양성소 개소와 함께 이를 운영할 ‘비행가양성사’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비행가양성 사’는 실제적으로 비행학교를 운영하는 주체로서, 학교 운영의 모든 재정적 책임을 전담하였다.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운영에는 김종 림과 북가주 일대의 벼농사를 경영했던 한인 재력가 들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김 종림’의 열성과 재정적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김종 림은 윌로우스에 3,000에이커의 대농장에서 벼농 사를 경작하여 매년 15만 석을 수확하는 대농장주 였다. 당시 1석당 8달러 정도 했는데, 김종림은 매년 120만 달러의 수입을 거두는 재력가였던 것이다. 그 한인비행가양성소에서 비행훈 련을 받는 한장호 한인비행가양성소 훈련용 비행 기 앞의 교관 브라이언트, 오른 쪽은 한장호 윌로우스 한인비행가양성소의 군사훈련 장면(이상 USC 디지털 아 카이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