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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세계평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다, 브뤼셀 103 는 유럽에서 주변 강국으로부터 숱한 침략을 받았음 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국권을 회복시키 는 강인한 국가였다. 유럽에 ‘벨기에’가 있다면, 아시 아에서 이에 비견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강국 인 독일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침탈당했다. 제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침탈당하고, 독일은 벨기에 국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도 독일에 맞서 투쟁을 하였으며, 일반 국민 들은 지하에서도 반독 활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독 일을 무찌르고 독립을 되찾았다. 3·1운동 당시 한국독립을 지지했던 벨기에 언론 1919년 파리평화회의가 개최될 당시 우리 독립 운동 세력들은 프랑스 파리에 ‘한국민대표관’이라는 외교기관을 설치하였다. 한국민대표관은 독립운동 사에서는 일반적으로 ‘파리위원부’라고 불렀다. 파 리위원부에서는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 소식을 전 파 하기 위해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와 같은 잡지를 발간했던 것과 같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유 럽지역에 알리기 위해 『자유한국(La Corée Libre)』 이라는 선전 책자를 배포하였다. 『자유한국』은 1920 년 5월에 제1호가 나온 후, 1921년 5월까지 전부 13 호가 발간되었다(4~5호 및 11~13호는 합본이므로 총 10책). 제1차 대전 당시 벨기에는 독일의 침략을 당해 엄혹한 지배를 받고 있을 때, 『라 리브르 벨지끄(La Libre Belgique)』 즉 『자유 벨기에』라는 지하신문을 발간하여 독일에 저항하였다. 독일 침략자들의 요구 를 거부하고, 1915년 2월부터 지하신문을 발행하였 다. 제2차 대전 때도 『자유 벨기에』는 비밀리에 발행 되었다. 이처럼 『자유 벨기에』를 통해 벨기에 국민들 이 지속적으로 독일에 저항을 할 수 있게 하여 자유 를 되찾는 데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전 세계에 독립국임 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그날부터 지하신문 『조선 세계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된 에그몽 궁전 3 · 1운동 당시 지하신문으로 발간된 『조선독립신 문』 제1호(1919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