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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북가주의 한국독립운동 중심지, 새크라멘토 103 새크라멘토 최고의 사업가, 이옥형 새크라멘토에서 가장 오랜 동안 거주하면서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로는 ‘이옥형’이 있 다. 이옥형이 미국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는 알 수 없다. 1906년 3월 공립협회 래드랜드지방 회에 입회하였고, 1907년 9월에는 새크라멘토지방 회로 이주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10월 클래몬트 한인학생양성소의 6반에 입학했으며, 1910년 6월에 는 공업을 배웠다. 그런 것으로 보아 미국에 공부를 하려고 왔다가, 학업을 그만둔 것으로 판단된다. 이옥형은 래드랜드, 롬폭, 로스앤젤레스 등 캘리 포니아 각지로 이주하며 다녔지만, 1915년부터 새 크라멘토에 정착하면서 이발소를 하면서 대한인국 민회 새크라멘토지방회를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하 였다. 1916년 10월 3일 사진신부로 온 서영애와 결 혼했다. 1918년에 새크라멘토지방회 회장으로 선 출되었다.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1919년 3월 9일 독 립선언의 소식을 이옥형에게 알렸다. 이옥형은 “각 하의 전보를 받아보고 본 지방 회원들은 오늘 저녁 으로 본 지방회관에 모여 우리의 독립을 경축하기로 정하였나이다”라고 답전을 보냈다. 또한 임시정부 조직 소식을 듣고, 새크라멘토 한인 250명은 이옥형 의 주재하에 축하식을 거행하였다. 이발소를 경영하던 이옥형은 언제부턴가 새크라 멘토에서 여관과 서양요리 음식점을 시작하였다. 그 런데 그의 음식점은 밤낮없이 계속 영업을 할 정도 로 하루에 수백명의 식객들이 찾는 ‘맛집’이었다. 그 의 식당에는 경제공황 중에도 한인 4~5명이 고용되 어 일을 했는데, 그의 영업 방법은 박리다매(薄利多 賣)였다. 이옥형은 “밥먹을 시간이나 잠 잘 시간도 넉 넉지 못하고 명절날도 없으나 돈은 그렇게 남지를 않습니다”라고 했다. 1935년에는 더욱 사업이 번창 하여 한인 9명, 백인들도 많이 고용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옥형은 새크라멘토에서 영업이 잘 되는 식당을 경영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하였다. 『신 한민보』 1936년 7월 16일자에도 “씨는 원래부터 시 종이 한결같이 국민회를 위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왔으며, 적으나 크나 우리 사회의 공익 사업에 대하 여 희생을 아끼지 않음은 일반이 잘 아는 바”라고 하 였다. 따라서 그는 국민회와 동포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내놓았다. 이옥형은 1930년도에도 새크라멘토지방회 회장 으로 선출되었으며, 1943년도에는 새크라멘토지방 회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신한민보』 1944년 1 월 27일자에 「 우리의 당면한 문제」라는 글을 게재하 였다. 이 글에서 “동포여! 같이 조선 국가를 건설하 자! 이 대사업을 성취하는데 금일 우리의 당면한 급 무는 군사운동이다. 군사운동이 그 무엇 보다도 먼 저 할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이옥형은 2022년 독립유공자(대통령표창)에 추서되 었다. 국민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문화재전문위 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미주한인사회의 한국독립운동』, 『미주한인 사회의 독립운동가』, 『권승렬 평전』, 『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연구』, 『일왕을 겨 눈 독립투사 이봉창』 등이 있다. 필자 김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