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page

3월의 전설(100회) • 부산의 만세시위(2) 103 보다 그런 것이 없는 주변부에서 강력한 만세시위가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 헌병 또는 경찰 주재소 같은 일제의 탄압기구가 있고, 일인 다수가 정착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큰 시위가 일어나지 못했다. “감시받는 노동자, 농민들은 저항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3 · 1운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상업, 일신여학교 동맹휴학 부산부(釜山府)의 한국인 학생 수는 부산·부산진보 통학교에 673명, 부산공립실업학교에 143명, 부산 진일신여학교에 165명으로 다 합쳐 981명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 학생은 6개 소학교에 4,093명, 사 립부산상업야학교 등 5개 중등학교에 1,229명이 재 학하여 합계 5,322명으로 5.4배나 되었다. 부산의 일제 경무당국은 서울과 평양 등 북한 대도 회지에서 들려오는 독립만세 시위소식에 더욱 긴장 하여 경계하고 있었다. 3월 3일에 좌천동에서 독립 선언서가 뿌려졌으나, 곧 발견되어 수거되었다. 3월 9일 아침 누군가가 부산 영주동, 초량, 부산진에 태 극기를 그리고 독립만세라고 써서 붙인 것이 발견되 었다. 즉 3월 9일이 되도록 부산에서는 시위다운 시 위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3월 10일 월요일부터 부산공립상업학교는 기말 시험기간이었다. 학생들은 시험을 보고 있었는데, 외 부 인사의 관여로 시위가 일어날 분위기가 감지되자 시험이 중단되고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3월 11일 최 초로 일신여학교에서 시위다운 시위가 일어났다.[지 난호 부산의 만세시위(1) 참조] 4월 1일부터 새학년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부산공 립상업학교에서는 학생 111명 중 등교한 학생은 50 여명에 불과했다. 등교하지 않은 학생 중 10여 명은 지방에서 부산에 와 있었으나, 다른 학생들이 등교하 지 않으면 수업받지 않겠다며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 고 근처 여관에 머물렀다. 교장은 극력 등교를 재촉 하고 있고, 부산경찰서에서도 학생들의 동정에 엄밀 하게 주의하며 경계하고 있었다. 3월 11일 만세시위를 했던 일신여학교도 4월 1일 부터 개학했으나, 110명 학생 중 58명만이 등교했 다. 만세사건 후 교장에 대한 행정조치, 교사 및 상급 생들의 수감 등으로 불안하여 학생 다수가 등교하지 부산 잔교(棧橋) 부두와 부산역(1919년) 오늘날의 부산진초등학교 모습(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