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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6회) • 파주의 독립만세시위 103 대부분 지역에서는 거기까지였다. 보통학교 만세 시위 뒤 후속 시위가 이루어진 경우가 별로 없었다. 판결문에 보면 “3월 25일 16세의 학생 김수덕과 24세 농민 김선명이 자기(임명애) 집에 와서 조선독 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하니 방을 빌려 달라” 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재판정에서 한 말로서, 임영애와 남 편 염규호(廉圭浩)는 더 큰 규모의 후속 시위운동을 준비하고자 두 사람을 오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염 규호와 임명애의 집에서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려면 격문을 배포하여 사람들을 모을 필요가 있다”며 격 문을 인쇄하기로 했다. 격문의 원고는 남편 염규호 가 작성하였다. 김수덕이 등사판을 빌려왔다. 격문의 내용은 “오는 28일 이민 일동은 윤환산으로 집합하 라. 만약 이에 불응하면 방화할 것이다’는 것으로, 주 민들을 동원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을 60여 매 등사 하여 김창실이 와석면 구당리(九堂里)·당하리(堂下里) 등지에 배부하였다. 시위는 하루 앞당긴 3월 27일에 일어났다. 3월 27일 임명애와 염규호 부부, 학생 김수덕, 농 민 김선명, 김창실 등은 700여 명의 동리민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에워 싸 고 외쳤다. “면서기들은 업무를 중단하라!”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었다. 시위대의 거사를 보 고 면사무소 주변 주민들이 더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1,50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교하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여 갔다.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교하 주재소 헌병들은 파주 헌병분소에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교하주재소와 파 주에서 지원나온 병력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했 다. 당하리 최홍주(崔鴻柱)가 현장에서 사망했다. 일 제 관헌의 무자비한 발포에 놀라 군중은 흩어졌다. 임명애는 나중에 징역 1년 6월 형을 받았다. 광탄면 및 조리면 3월 27일 광탄면 발랑리 농민들인 조무쇠(曺茂釗, 26세), 이인옥(李仁玉, 28세), 남동민(南東敏, 24세), 정천화(鄭天和, 31세), 정갑석(鄭甲石. 26세), 이기하 (李起河. 22세), 정봉화(鄭奉和, 28세), 강흥문(康興文, 28세) 등은 이민 수백명과 함께 경기도 파주군 광탄 면 사무소 앞에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와석면 3.1운동 주동자 임명애(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당시 와석면사무소 3 · 1운동 만세 시위지 전경(현 교하읍사무소, 2019년, 독립기념관 제공)